죽은 김일성이 남북 관계 살린다
  • 남문희기자 (bulgot@e-sisa.co.kr)
  • 승인 2001.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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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4월15일 90세 생일에 '획기적 전기' 있을 듯…
2월에는 북·미 대화 본격화
남북 관계의 불문율 한 가지.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 한다. 최근 북한 체제에 정통한 전문가와 소식통 들이 '숲'으로 제시한 것이 60·90이다. 9·15 장관급 회담 이후 남북대화가 갈지자를 걷고 있는데, 그 해답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60·90은 무엇인가. 60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0세 환갑을 맞는 내년 2월16일이다. 90은 김일성 주석의 90세 생일인 내년 4월15일이다. 다시 말해 내년 2·16과 4·15가 남북 관계에 획을 긋는 시기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4·15 행사 때 남측 인사 초청 계획

 




북한이 2·16과 4·15에 초점을 맞추어 대내외 정책의 속도를 조절할 것이라는 조짐은 이미 올해 초부터 있어 왔다. 〈로동신문〉 등 북한 매체들은 올해 초부터 '전부문은 60·90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올해 초부터 해외에서 이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속속 결성되었다. 급기야 지난 7월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 주민 10만여 명이 참석해 '김주석 90회 생일을 성과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평양시 군중대회'를 열기도 했다.


올해 초의 열기가 군중대회로까지 이어지자 북한 전문가 김남식씨는 지난 8월 기자에게 앞으로 모든 초점이 2·16과 4·15에 맞춰질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측했다. 최근 다시 만난 그는 "2·16 행사는 북한이 내부적으로 치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4·15 행사는 대내외적으로 치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4·15 행사를 대내외적으로 치른다는 것은 바로 남측 인사 초청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 '8·15 평양 축전' 후유증이 심각해 남측 인사가 김주석 생일 기념일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해지려면 남북 관계가 어지간한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고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즉 그 이전에 뭔가 화끈한 진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2·16을 전후한 시기다.


정통한 북한 소식통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각 부문이 올린 보고서들이 최근 취합되어 결론이 난 상태라고 한다. 남북 관계와 북·미 대화 일정뿐 아니라 대내외 정책의 가닥이 잡혀 가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남북 관계의 정점이 바로 2·16과 4·15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9·10월에 남북대화가 꽉 막힌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분위기 조성용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10월로 예상되었던 북·미 대화가 가장 중요했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8·15 통일축전으로 궁지에 몰린 남한의 대화파에 대한 배려도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지난 3월 한·미 정상회담 이후 북·미 간에는 겉으로는 대화가 중단되었으나 이면에서는 접촉이 많았다. 여기서 가장 넘기 힘든 산이 바로 북한의 재래식 전투력 문제였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주한미군 지상군 처리 문제가 초점이다. '냉전 후 신 국제관계'라는 큰 그림을 추구해온 부시 행정부에게 주한미군 지상군은 매우 낭비적이다. 괌을 중심으로 한 동남아 거점 기지로 부분 철수라도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북한이 명분을 주어야 한다. 북한 재래식 군축 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한 배경이다.


처음에는 반발하던 북한도 분주히 주판알을 튀기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지난 4월부터다. 북한 관영 매체가 이 때부터 주한미군이 먼저 철수하라는 주장을 했고, 김위원장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엉뚱하게' 이 문제가 합의문 맨 꼭대기에 올랐다. 북한과 미국이 내심 이 골치 아픈 현안을 다룰 시기로 잡은 것이 바로 10월이다. 두 가지 중요한 일정이 예고되어 있었다. 그 하나가 미국 국방부가 4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국방전략재검토(QDR)이다. 미국 의회 보고 시점인 9월30일이 'D데이'였다.


그런데 9월11일 뉴욕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테러 발생 3일 전인 지난 9월8일. 폴 월포위츠 미국 국방부 부장관이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청 장관에게 '재검토 보고서' 내용과 관련해 매우 중대한 발언을 했다. 앞으로 15년에 걸쳐 아·태지역 주둔 미군이 감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가 발언하기 하루 전 피터 브루크스 국방부 부차관보는 같은 내용을 언급하면서 다만 "주한미군 감축 여부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하다"라고 밝혔다.


두 가지 얘기의 결론은 자명하다. 앞으로 아·태 주둔 미군을 감축할 예정인데, 주한미군에 대해서는 북한과 협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10월이 바로 빅딜 시기였던 것이다.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 국방부로서는 이처럼 '한가한' 보고서를 내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내용을 수정했다. 미국 영토 방위에 국방 전략의 중점을 기울인다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었고, 아·태 주둔 미군 군사력은, 감축이 아니라 증강하겠다는 수정판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북한, 부시 방한 취소되자 이산가족 상봉 연기

 




부시 미국 대통령의 한국 방문이 취소된 것은 또 하나의 사건이다. 그의 서울 방문은 북·미 대화의 신호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재검토 보고서 내용이 수정되면서 북·미 대화의 핵심이 빠져버리자 서울 방문 의미가 축소되어 버렸다. 부시 대통령이 상하이로 직행하기 전날, 연합통신과 회견하면서 북한에 대해 신경질을 부린 것도 이해는 할 만하다. 북한이 빨리 대화에 응했다면 모양새가 달라지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북한도 할 말이 있다. 재검토니 뭐니 하면서 시간을 질질 끈 쪽이 누구냐는 것이다.


어쨌든 이로 인해 남북대화만 김이 빠져 버렸다. 먼저 이산가족 상봉이 타격을 받았다. 사실 이산가족 상봉은 부시 대통령이라는 '주빈'을 환영하기 위한 전야제 행사였다. 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10월16일부터 18일로 상봉 날짜가 잡혀 있었는데, 그 마지막 날 부시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빈이 빠진 행사가 될 것이 분명해지자 지난 10월12일 북한 조평통은 남한의 경계 강화 때문이라는 알쏭달쏭한 이유를 들어 행사를 연기해 버렸다.


북·미 대화라는 주메뉴가 빠져버리자 여타 남북대화도 성격이 변질되었다. 돈 문제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내년 4·15 행사에 돈이 많이 필요한 북한은 이번 대화 국면에서 사실 금강산 관광 미지급금을 받아내려고 했다. 목적만 너무 부각하면 야멸찬 인상을 줄 것이 분명하므로 이산가족 상봉 등 현안이 같이 들어간 것인데, 이것이 빠져 버려 초점이 너무 뚜렷해진 것이다. 그러나 현금을 눈앞에 두고 포기할 수도 없는 처지다. 무엇인가 또 다른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요즘 북한 군부 이상설이 나돌고 있다. 금강산 대금이 안 들어가 북한 군부가 격앙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조차 통제가 불능하다는 얘기는 좀 심했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앞의 '재검토 보고서'를 다시 한번 보자. 보고서에는 미국의 국익과 관련해 동아시아가 1순위로 떠올랐고, 동아시아는 다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와 나머지 지역(타이완을 비롯한 동남아 및 남아시아)으로 구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왜 동아시아를 둘로 나누었을까. 그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미군의 초점 이동, 즉 한반도로부터 동남아시아로 이동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 시기가 바로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연동되어 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통해 미국의 '냉전 후 전략'을 완성하려 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할 수만 있다면 중앙아시아 및 카스피 해뿐 아니라, 인도와 파키스탄을 묶어 중국의 서부전선을 도모할 수 있다. 물론 미군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가정한 얘기다. 미국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겨울 이전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으니, 내년 초면 주한미군 이동 문제가 다시 떠오를 수 있다.


지난번 한국 방문이 무산된 것을 '유감으로 여긴' 부시 대통령이 내년 초에 다시 오겠다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일정과 관련이 있다. 여기에 북한 전략가들의 60·90 구상을 오버랩해 보자. '북·미 대화는 내년 2월에 본격화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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