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땅에 '희망' 만드는 평화운동가와 NGO들
  • 박성준 기자 (snype00@e-sisa.co.kr)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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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운동가 · NGO 활약 '현장 보고서'
그녀의 이름은 소피. 프랑스에서 태어난 20대 중반 여성으로, 보스니아·크로아티아·옛 유고슬라비아 등 분쟁 지역을 돌며 구호 활동과 인권운동을 벌여온 평화활동가다. 최근 그녀는 한국인 친구에게 e메일을 띄웠다. 용건은 자기가 영국에 본부를 두고 전세계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평화운동을 벌이는 비정부기구(NGO)인 '국제평화여단(PBI)'에 자원해 내년부터 인도네시아 북단 아체로 파견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피가 말한 아체는 최근 오랜 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동 티모르, 또 하나의 분쟁 지구인 서 티모르 등과 함께 종교 갈등과 종족 마찰이 끊이지 않는 인도네시아에서도 대표적인 분쟁 지역이다. 소피가 선택한 장래의 아체 생활은 고달프고, 심지어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조직화·전문화한 NGO 잇달아 탄생


먼저 그녀는 식품구입비와 숙박비, 약간의 잡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생활비를 현지에서 조달해야 한다. 또 그녀는 신체 위험은 물론,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할 상황에 놓일지 모른다. 국제평화여단은 자원자들에 대한 납치·무단 체포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상 대응 네트워크'라는 일종의 안전판을 마련해두고 있지만, 현장 활동은 그녀 스스로가 한국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썼듯이 '위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성격의 일인 것이다.




케빈 클레멘츠 : 현재 전세계에 1백70여 회원 조직을 거느린 국제 평화 단체인 인터내셔널 얼럿을 이끌고 있다.


소피만 그런 것이 아니다. 1981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평화 사상에 영향을 받아 출범한 국제평화여단은 매년 소피와 비슷한 조건으로 자원자를 뽑아 분쟁 지역에 들여보냈다. 많게는 10명, 적게는 2∼3명으로 팀을 꾸려 일정한 훈련 과정을 거친 뒤 중남미의 니카라과·과테말라·멕시코·스리랑카·인도네시아 등지에 장기간 파견해 온 것이다.


잠재적인 위험은 아까운 인명이 희생되는 비극으로 현실화하기도 했다. 국제평화여단이 처음 시작한 일은, 1983년 자원자 10명을 선발해 니카라과와 온두라스 접경 지역에 있는 잘라파로 보내 분쟁 종식을 돕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자원자들은 분쟁 악화를 방지하고 인권이 침해되는 일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과정에서 자원자 한 사람이 희생되었다. 1998년 벨기에 출신 자원 봉사자가 공동 묘지에서 시체로 발굴되었던 것이다.




타판 쿠마르 보세 : 인도 카슈미르 상황에 정통하다. 현재 남아시아 인권포럼 사무총장. 다큐멘터리 영하 제작자이기도 하다.


인도 카슈미르, 스리랑카 타밀, 필리핀 민다나오, 인도네시아, 팔레스타인, 북아일랜드 등 전세계 분쟁 지역에서 '해결사'들이 뛰고 있다. 비폭력 평화 사상으로 굳건히 무장한 국제적 비정부기구 회원들이, 생명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를 앞당기고 분쟁을 종식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과거 분쟁 종식과 평화 유지는 비정부기구 중에서도 주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 인권단체의 영역에 속했다. 하지만 세계의 분쟁 상황이 악화하면서 분쟁 종식과 갈등 해소 노력을 좀더 조직화·전문화할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평화단체들이 잇달아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5년 영국 런던에 사무국을 두고 출범한 비정부기구 인터내셔널 얼럿도 그 중 하나다.




유도 포에즈 워디닥도 : 인도네시아 평화와 화해센터 소장. 종교 · 종족 문제로 촉발된 인도네시아 분쟁 해결에 매진해 왔다.


현재 전세계에 1백70여 회원 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이 단체의 초대 사무총장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사무총장을 지냈던 마틴 에널즈. 국가 간이 아닌, 국가 안에서 폭력적 분쟁이 점증하고, 이같은 상황에서 인권 유린 사태가 빈발함에 따라 전문 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이 독립한 것이다.


유엔에 등록된 같은 비정부기구인 동시에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단체이지만, 인터내셔널 얼럿의 활동 방식은 국제평화여단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이 단체는 국제평화여단처럼 자원자로 팀을 구성해 분쟁 현장에 직접 투입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 단체는 분쟁 지역의 또 다른 인권단체나 개인과 손잡고 분쟁 당사자간 대화 분위기를 만드는 데 힘쓰거나, 좀더 지속적인 평화 상태를 이룩하기 위해 교육과 훈련·홍보에 주력한다.




사라 오자키 라자르 : 이스라엘의 유럽-아랍인 평화 센터 소장. 이 센터는 유태인 · 아랍인을 매년 3만명씩 교육한다.


창립 이후 이 단체가 중점을 둔 사업은 여성 문제와 개발 원조, 경량 무기 이전 감시 사업이다. 특히 이 가운데 여성 문제에 관련된, 이른바 '여성 평화 만들기'라는 캠페인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단체는 폭력적 분쟁 사태의 최대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점, 따라서 누구보다 평화를 절실히 원하는 당사자라는 점에 주목해 평화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여성의 잠재 능력을 개발·향상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왔던 것이다.


유엔여성발전기금(UNIFEM)과 함께 제정한 '밀레니엄 여성 평화상'은 이 단체가 일군 주요 결실 중 하나이다. 인터내셔널 얼럿은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 코소보-알바니아계 인권운동가 베네란다 잠바자마리아, 파키스탄 여성운동가 아스마 자랑기르 등 개인 또는 단체 7명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이 단체는 또한 무장 집단간 무기 밀거래를 근절하는 데도 힘써 유엔과 함께 '총알 프로젝트'라는 캠페인을 입안하기도 했다.


서울 심포지엄에서 평화 공존 10개항 제시




닉 류어 : 영국 브래포드 대학 평화학 교수. 스리랑카 타밀 지역에서 실천적인 평화 정착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세계에는 이들 단체 외에도 1890년대에 창설한 이래 지금까지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무려 13명이나 배출하면서 세계 평화운동의 구심점 노릇을 하고 있는 국제평화사무국(IPU) 등 굴지의 비정부기구들이 종교와 피부 색깔, 이념과 국경을 초월해 활동하고 있다.


최근 이들 단체의 대표자들이 서울에서 뜻깊은 만남을 가졌다. 지난 11월20∼22일 사흘간 유네스코 산하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이 주최한 '분쟁 지역에서의 평화운동과 교육' 국제 심포지엄이 그것이다. 행사장 분위기를 지배한 것은 단연 최근 진행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우려였다.




로렌스 서랜더 : 인도 마드리드 대학 객원 교수. 화학자 출신이자 경제학자로 평화와 개발이라는 문제를 천착해 왔다.


행사 첫날, 케빈 클레멘츠 박사(인터내셔널 얼럿 사무총장)는 기조 연설을 통해 '오늘날의 세계가 세계화와 종족화(지역화), 두 가지 상반된 경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10개 항목을 제시했다. 그가 내놓은 처방전 제1 조목은 '변화와 희망의 징조를 찾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다. 그의 말은, 바꾸어 말해 평화운동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용기와 희생 정신이 아닌, 미래에 대한 희망임을 암시한다. 그들은 바로 이같은 희망에 기대어 세계의 분쟁 지대로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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