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최후 통첩에 부시 '발끈'
  • 남문희 기자 (bulgot@e-sisa.co.kr)
  • 승인 2001.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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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중단 통보하자 "대량살상무기 검증"…
강온 전략 동시 구사용 발언
미국과 북한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지난 11월27일 한반도 정세는 갑작스런 파열음을 냈다. 11월26일 부시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 발언이 원인이었다. '폭탄 발언'을 즐기는 부시 대통령은 이날도 예외가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이라크를 확전 대상으로 암시한 점은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슬그머니 북한까지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었지만 "북한도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검증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그 전날 〈뉴욕 타임스〉가 '탈레반 다음에는 북한도 당할 수 있다'는 경고성 기사를 내보낸 뒤여서 파문은 증폭되었다. 이는 지난 11월18일 제네바에서 열린 생물무기협약(BWC) 제5차 평가회의에서 북한을 오사마 빈 라덴과 이라크에 이어 국제 안보를 위협하는 생물 무기 개발국으로 공개 지목한 존 볼턴 국무부 차관보의 발언을 곱씹게 만들었다.


느닷없이 직격탄을 맞은 북한은 지난 11월27일 비무장지대에서 애꿎은 남측 초소에 총질을 해대며 화풀이했다. 또 28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의 적대 정책에 맞서 우리도 대응책을 강구하겠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멀리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구경꾼 심경으로 지켜 보다가 전쟁의 그림자가 갑자기 발밑에서 어른거리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했다.


지난 11월27일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진화에 나서기는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미 양자 협의에서 "대북 정책이 바뀐 것은 아니다.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을 뿐이다"라고 우리측 대표에게 해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는 그의 해명에 고개를 저었다. 뭔가 분명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왜, 어떻게 바뀌고 있다는 것일까.


그는 우선 부시 대통령의 발언이 치밀한 계산과 고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전에 국무부를 비롯한 미국 정부 내에서 발언 수위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을 미국이 지목하는 국제 테러 국가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러기에는 무리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그런 분위기가 담겨 있다. 즉 이 보고서는 '미국에 의해 테러 지원국으로 지목된 쿠바 북한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수단 중 비중동권인 북한과 쿠바는 냉전체제 종식 후에 상당히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직은 후자의 입장이 다수인 것을 알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이 직설 화법보다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한 점,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한 검증 허용에 수위를 맞춘 점 등에서 고심한 흔적이 드러난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이 난데없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거론하고 나선 것은 분명 심상치 않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부시의 발언은 바로 그 초입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책의 내용에 대해 워싱턴 전문가는 그동안의 대화 전략에서 강온 배합 전략으로 넘어가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부시 행정부가 등장한 이래 미국의 대북 정책은 커다란 굴곡을 보여왔다. 첫 번째 단계가 정권 초반기에 있었던 강경책이다. 지난 3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의도된 강경 발언을 통해 남북 관계가 미국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막는 데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 대화 자체를 중단하고 외교 공세를 펴자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북한, 중국·러시아와 밀약 맺고 배짱?

 




그래서 지난 6월 대화 재개를 선언하고 2단계인 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핵과 미사일 검증, 재래식 무기 감축을 협상 의제로 하여 언제 어디서든 만나 대화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정책 역시 벽에 부딪혔다. 워싱턴 전문가는 두가지 새로운 일이 최근에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우선 최근 금강산 장관급회담 결렬을 계기로 남북 대화가 기약 없이 중단되었다. 원래 미국은 남북 대화를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이를 북·미 대화로 연장하려 했다고 한다. 이른바 미국식 '대남 카드'였는데 퇴색한 것이다.


더 심각한 일이 최근 북·미간 이면 접촉 과정에서 발생했다. 북측이 뉴욕 채널 등을 통해 현재의 조건에서는 미국과 대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최후 통첩'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이 제시한 대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 불만을 표시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이번 경우에는 심상치 않았다고 한다. 미국과의 대화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의 대북 정책 전제가 무너지는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에 연연하고 있다는 것을 정책 수립의 전제로 삼아왔다. 다시 말해 북한의 대외정책 0순위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다. 따라서 미국은 급할 것이 없고 북한이 급할 뿐이라고 굳게 믿어 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으레 되풀이하는 소리겠거니 했다. 그러다가 점점 실제 상황일지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북한이 왜 갑자기 여유 있는 태도로 바뀌었을까를 곰곰이 따져보던 미국 당국자들의 뇌리에 바로 북한과 중국·러시아와의 관계가 떠올랐다. 지난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했고, 9월에는 장쩌민 중국 주석이 북한을 방문했다. 이때 북·중, 북·러 간에 뭔가 밀약이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북한이 배짱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 것이다.

 


미국, 북·중 밀착하면 '낭패'

 


때마침 지난 11월13∼15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다. 북한의 의중을 떠볼 중요한 기회였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단둘이 만난 자리에서 은밀하게 이 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할 의사가 있다는 점을 전해 달라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김정일 위원장과 만났을 때 무슨 얘기를 했느냐가 초점이었다. 워싱턴 전문가는 부시와 푸틴 간의 이 대화 내용이 최근 북·미 간의 내밀한 움직임에 대한 단서였다고 말했다. 이 대화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최후 통첩을 보냈다는 점과 워싱턴 당국이 이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 포착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바로 그 배경에는 북·중 관계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러시아만 해도 미국과 '기브 앤드 테이크'가 된다. 그러나 중국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미국의 통제 밖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해 외양은 화려하나 속은 골병이 든 데 비해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올림픽 유치 등으로 국제적 위상이 치솟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에 등을 돌리고 중국과 밀착하게 된다면? 동북아에서 미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생각이 미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을 다시 대화 테이블로 끌어들이려면 뭔가 고단위 처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리라는 분석이다.


현재로서는 북한의 최후 통첩이 언제 어떤 경로로 전해졌는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양측의 공개 발언을 추적해보면 대략 그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11월16일 평양방송과 조선중앙방송은 뜬금없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즉 리형철 뉴욕 주재 북한대표부 대사가 지난 10월13일 유엔 총회에서 했다는 발언을 뒤늦게 소개한 것이다. 리대사가 이때 미국과의 대화 조건으로 △주한미군 철수 △클린턴 정부 수준의 대북 입장 견지 △북한의 자주성 존중과 통일 방해 중단 등을 제시했다고 한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북측이 뭔가 뜬금없는 내용을 보도할 때는 반드시 내막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리대사 연설에 대한 미국측 응답에 그 실마리가 있다. 즉 지난 10월24일 잭 프리처드 한반도평화회담 특사가 미국의 입장을 종합해 밝혔다. 그는 9·11 테러 이후 북한이 테러 행위를 규탄하고 미국에 조의를 표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밝혔다. 테러 국가들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제공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는 또 '북한이 클린턴 행정부와 검증을 강조하는 부시 행정부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리대사의 제안을 일축했다.


따라서 북측의 최후 통첩은 프리처드의 발언이 있었던 10월24일에서 푸틴이 미국을 방문한 11월13일 사이에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평양방송 보도를 통해 북한이 이를 다시 확인한 셈이다. 사실 9·11 테러 이후 미국과 북한은 뉴욕 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접촉했다. 특히 미국측은 북한이 테러 정보를 넘겨주면 관계 개선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북측도 초기에는 리형철 대사가 이에 화답하는 등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듯했다.




그러나 급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북한 정보 소식통은 그 내막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초기에 리대사는 자신의 감으로 어느 정도의 정보는 주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나 오사마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 게 아니라 이라크와 북한 간의 무기 거래 루트 정보를 요구한다고 밝혀지면서 상황이 급전했다. 북한 군부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것이다." 이라크에 대한 무기 거래 루트는 북한 군부의 돈줄이다. 더군다나 그 정보가 넘어갈 경우 미국이 북한을 이라크와 연동해 확전의 대상으로 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미국이 지난 6월 이래 대화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던 핵·미사일·재래식 무기 문제에서 한치의 진전도 없었다. 북한은 클린턴 정부 말기 수준에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김정일 장군님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만나 이미 합의한 사실을 정권이 바뀌었다고 뒤집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완강한 인식이 깔려 있다.


미국이 반대 급부를 밝히지 않고 재래식 무기를 감축하라고 요구해온 것도 걸림돌이었다. 북한은 그동안 뉴욕대표부를 통해 미국 의중을 탐색해 왔다. 그에 반해 미국은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고 주장해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북한은 클린턴 정부 시절 대화의 출발점이었던 적대 정책 포기와 관계 정상화 약속을 미국보고 먼저 하라는 것이고, 미국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북한과 미국, 새로운 대화 통로 모색

 


미국은 앞으로 부시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대로 북한이 다시 대화 테이블로 돌아오지 않으면 대량살상무기 문제 등을 계속 거론하겠다며 압박 공세를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 미국 내에서 '북한인권위원회'가 구성되고, 미국국제종교자유위원회(CIRF)가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종교 탄압이 심한 국가로 지정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외곽을 때리는 전통적 수법 역시 병행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대화 움직임도 모색하고 있다. 최근까지 뉴욕 채널을 통해 미국 고위급 인사의 방북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북측 역시 새로운 대화 통로를 모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박길연 외무성 부상이 새로 유엔 대표부 대사로 부임한 것이 바로 최근의 가장 중요한 움직임이다. 신임 박대사는 미국 공화당 정부 시절인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유엔 주재 북한대사를 지냈다. 따라서 공화당뿐 아니라 재미 동포 사회에도 발이 너른 인물이다. 이와 함께 내년 초쯤에는 현재의 리 근 부대사 대신 김정일 위원장의 측근 인물이 대미 담당 부대사로 부임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현재 유일한 대화 창구인 뉴욕 채널이 격상하고 있는 점이 앞으로 북·미 관계의 또 다른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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