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주의' 대변인 초국적 언론 재벌
  • 멜버른·남상민 통신원 (autumnsky@e-sisa.co.kr)
  • 승인 2001.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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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OL - 타임워너 · 뉴스 코퍼레이션 등
'미디어 권력' 보도 행태 분석
'텔레비전에 나온다, 고로 존재한다.' 지구적 정보 흐름에서 이미지의 힘은 막강하다. 이미지는 국제 정치에서도 괴력을 발휘한다. 영상으로 전달되지 않는 사건은 그 자체의 존재성을 잃어버린다. 특히 사람들이 고통받는 상황을 영상으로 보지 않을 때 대중이 그 사건과 개인의 연관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영상으로 전달된 사실만이 진실 전체를 대변하기도 한다.




이번 미국의 테러 보복전은 이미지의 과잉과 결핍을 교묘히 결합해 진행된 전쟁이다. 여객기의 뉴욕 쌍둥이 빌딩 충돌과 붕괴 상황, 피해자 추모 행사, 탄저균 공포 등에 대한 이미지는 국제적으로 홍수를 이루었다. 한편으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에는 언론, 특히 텔레비전이 증인으로 참관하지 못했다. 공습의 이미지는 황량한 산등성이에서 폭발하는 포탄, 폭격기의 카메라에 담긴 탈레반 군사 시설 파괴 장면이 전부였다. 페르시아 만 전쟁 때 미국의 바그다드 야간 공습처럼 피해자 개개인의 고통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지난 10월11일자에 일찌감치 규정한 것처럼 이번 전쟁은 '증인 없는 전쟁'이었다.


공습 피해자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전쟁 수행 방식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전쟁의 비인격화'는 미국 언론이 부시 정부에 적극 협조한 결과물이었다. 부시 정부는 전쟁의 성격을 '우리와 그들' '선과 악' '성전' '무한 정의' 같은 언어들로 규정했고, 언론은 이런 가치에 대중이 혼란을 느끼지 않도록 '상대'가 겪는 고통은 보도 대상에서 제외했다. "아프가니스탄의 고난과 피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CNN 월트 이작슨 회장의 보도 지침은 미국 언론의 입장을 대변한다.


미국의 전쟁 이미지 조작에 적극 참여


미국이 전쟁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얼마나 애쓰는지는 미국 국방부가 지난 10월 말 홍보 기업 렌던 그룹과 계약을 한 데서도 드러난다. 미국의 테러 보복전에 대해 '세계의 다양한 그룹과 효과적으로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 국방부의 홍보 자문을 맡게 된 렌던 그룹은 이전부터 중앙정보국(CIA)과 계약을 맺고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 활동 홍보를 도왔다. 전쟁 피해를 보여주지 않는 홍보 방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3년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때였다. 당시 이런 전략을 세운 이들은 홍보 기업 출신인 레이건 대통령의 참모들이었다.




이런 미국의 전쟁 홍보 전략을 현실성 있게 만든 것은 초국적 미디어 재벌이다. 대부분 미국을 기반으로 하지만 전파 송신과 사업 영역이 초국가적인 미디어 재벌 선두에 있는 기업은 AOL-타임워너·뉴스 코퍼레이션·비아콤·비벤디·디즈니·베텔스만이다. 올해 초 천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 규모 합병으로 탄생한 AOL-타임워너는 그 중 대표적인 초국적 미디어 재벌이다. AOL은 세계적으로 3천만이 넘는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고, 방송 관련 자회사가 CNN 인터내셔널을 포함해 44개에 이른다. 〈타임〉 등 잡지도 60여 종 발행해 전세계에 2억7천만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지난 9월, 중국 정부로부터 광둥성 지역에서 지역 민방 설립 허가를 받아 서양 언론 재벌 중 처음으로 중국 본토에 진출할 발판을 마련한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도 규모가 엄청나다. 뉴스 코퍼레이션은 스타 TV·폭스 방송· 〈뉴욕 포스트〉·〈타임스〉 등 방송사와 일간지를 포함해 50여 나라에서 언론 기업을 8백여 개나 운영하고 있다. 이 두 기업에 비해 오락 및 문화 프로그램의 비중이 더 큰 다른 미디어 재벌들도 마찬가지로 초국적 방송 매체를 확보하고 있다.


AOL-타임워너 다음으로 큰 초국적 미디어 재벌인 비아콤은 미국 CBS와 영화사 파라마운트, 그리고 세계 최대의 음악 전문 방송인 MTV를 소유하고 있고, 비벤디는 영화사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유럽 30여 나라에 방송 채널을 보유하고 있다. 디즈니도 미국 ABC 방송과 유럽 5개국·중동·말레이시아 등에 방송 채널을 가지고 있고, 독일 기업인 베텔스만 역시 세계적인 출판사 랜덤하우스, 음반 제작사 BMG 등 53개 나라에 언론 기업을 6백개 보유하고 있다.


이들 초국적 미디어 재벌은 1990년대 정보 통신 기술 발전과 신자유주의 흐름이 가져온 전파에 대한 규제 약화에 힘입어 등장했다. 개별 미디어 재벌의 주요 사업 영역은 서로 다르지만 팽창 방식은 비슷하다. 유통망과 컨텐츠를 함께 장악해 미디어 권력 집중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미디어 재벌의 성장세는 눈부시다. 20년 전에는 세계 1000대 기업에 들어가는 미디어 기업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제는 이들 모두 300대 기업에 진입했다. 이런 성장은 미디어 기업 간의 먹고 먹히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런 미디어 재벌의 근거지인 미국의 경우 소수 대기업이 언론 시장을 과점하고 있다. 1980년대 초 50여 개에 달하던 대규모 언론 기업은 지금 6개로 줄어들었다.


설 자리 잃어가는 비판적 저널리즘


AOL-타임워너의 최고 경영자 제럴드 레빈은 "우리를 미국 기업으로 보지 말라. 우리는 국제적으로 생각한다"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적절한 지적이다. 이 기업들이 국경을 넘어 사업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 문제가 미국의 이해와 부딪칠 때에는 국제성을 버리고 '미국주의'를 대변한다. 이번 전쟁에서 이들은 미국 정부가 원하는 '우리'쪽의 이미지만 과잉 생산했다.


지난 11월28일, 아프가니스탄 마자리-이-샤리프에서 일어난 탈레반 포로들의 폭동은 사흘 만에 끝났다. 전투기와 탱크를 동원한 진압 작전으로 포로 4백50여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다. 포로들이 자국으로 돌아가면 결국 테러리스트라는 부메랑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근심을 덜었다. 하지만 포로들의 인권 문제는 묻히고 말았다. 국제사면위원회가 진상 조사를 요구했지만, 초국적 미디어 그룹들은 죽은 포로에 대한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미디어 재벌에게 포로들은 개인이 아니라 탈레반 혹은 친 탈레반 외국 병사들이며, 포로수용소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켰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폭도였을 뿐이다.


반면 초국가 미디어들은 이 과정에서 죽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CNN과 뉴스 코퍼레이션의 폭스 뉴스 등은 이 요원의 삶을 헤드라인 뉴스로 다루었다. 덕분에 전세계인은 작은 도시에서 자라 청운의 꿈을 품고 중앙정보국 요원이 된 서른두 살의 조니 마이클에게 아내와 세 아이가 있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폭스 뉴스는 CNN보다 한술 더 떠 '영웅, 작전에서 죽다'라는 제목으로 홈페이지를 꾸몄다.




결국 이번 전쟁은 이들 초국적 미디어 재벌의 사업 영역이 얼마나 세계적인가와 상관없이 보도 관점이 미국 중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들 기업의 이런 본질적 한계는 미디어의 막강한 힘을 생각할 때 매우 위험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초국적 거대 미디어의 소수 편집자와 기자들이 편향적으로 선택해 공급하는 정보와 관점을 거침없이 전세계에 확산하면, 대중은 정보를 취사 선택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정보와 정치적 관점, 문화적 컨텐츠는 미국 등 서방의 이해를 대변하고 세계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초국적 언론 재벌 전문가인 일리노이 대학 로버트 맥체니 교수는 이들이 불평등한 체제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사업 영역의 국제성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보수 입장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또한 이는 문화·정치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독약'이라고까지 단언한다.


전통적 언론 기업이 오락 기업에 흡수되어 상업적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도 위험성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정보와 오락의 결합, 광고와 논조의 결합이 이루어져 비판적 저널리즘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기자연맹(IFJ)은 지난 6월 서울 총회에서 초국적 혹은 거대 미디어 재벌이 '언론인들의 사회적·직업적 권리를 위협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이런 위험성을 보이는 미디어 재벌의 선두에 루퍼트 머독과 그의 뉴스 코퍼레이션이 서 있다. 루퍼트 머독은 본인의 정치적 보수성과 서방의 이익을 자체 미디어에 가장 두드러지게 반영하고 있다. 중동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과 절친한 그는 자기가 소유한 매체에 이스라엘을 부정적으로 다루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군이 열두 살짜리 팔레스타인 소년을 학살한 사건을 다루려던 〈타임스〉의 아프리카 특파원이 사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항상 정치적 보수성을 앞세우는 것은 아니다. 중국이 영국 BBC의 보도 태도에 분개하자 머독은 자기가 소유한 매체에서는 BBC 뉴스를 서비스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는 다른 언론 재벌보다 한 발짝 앞서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상업적 이해를 무엇보다 더 중시하는 것이다.


미국, 아랍 대변하는 '알 자지라 카불 지국' 폭격


초국적 미디어 재벌은 미국 정부와 타협하며 성장하고 있다. 9·11 뉴욕 테러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은 9월13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방송사 지분 소유 상한과 동일 지역에서 신문과 방송사를 동시에 소유하는 데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펴겠다고 예고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아들인 연방통신위원회 의장 마이클 파월이 전격 발표한 이 정책에 대해 미국의 언론 비평 전문 기관 '디지털 민주주의 센터' 등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부시 대통령 정부가 전쟁을 앞두고 AOL-타임워너·비아콤·뉴스 코퍼레이션 등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려 있을 때 재빨리 언론 재벌의 손에 당근을 쥐어준 셈이다.


10년 전, 페르시아 만 전쟁 때에는 연방통신위원회가 채찍을 휘두른 적이 있다. 언론이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을 비판하자 연방통신위원회 의장이 나서 애국주의적 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하며 언론을 압박한 것이다. 이 발언 이후 언론의 보도 태도는 정부 옹호 쪽으로 급선회했다. 어쨌든 이번에 규제 완화라는 선물을 받아든 미디어 재벌은 새로이 도약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번 미국의 테러 보복전에서 구미 미디어 재벌들이 설정한 이미지 틀을 약화하고, 부시 정부가 지칭하는 '그들'의 비인격화를 조금이나마 줄인 것은 카타르의 위성 방송 알 자지라였다. 그러나 미국이 끊임없이 불편해 한 알 자지라의 카불 지국은 북부동맹군이 카불로 진격할 무렵인 11월12일 새벽, 미국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결정적 순간에 현장 보도 기능을 잃고 말았다. 현재 알 자지라는 CNN의 보도를 받아서 방영하는 형편이다. 아랍의 이해를 대변하는 언론과 미국의 이해를 대변하는 언론 간의 관계가 역전된 이 사건은 미국의 테러 보복 전쟁과 미디어의 관계를 극명하게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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