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 로비는 칼같이 통한다
  • 변창섭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2.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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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사모 투자사, 부시 전 대통령 등 '거물' 앞세워 승승장구
미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테러 참사가 발생한 지난해 9월11일. 비록 우연의 일치이기는 했지만 테러가 발생한 당일 워싱턴 시내 리츠 칼튼 호텔에서는 한 세계적인 투자사의 연례 투자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첨단 기술 동향을 주로 싣는 잡지 <레드 헤링> 최근호에 따르면, 당시 이곳에는 한때 미국을 호령하던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과 프랭크 칼루치 전 국방장관, 그리고 미국 테러의 주범으로 꼽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일가 대표들도 모습을 나타냈다.

도대체 어떤 투자사이기에 정계 거물은 물론 빈 라덴 집안 사람들까지 모이게 만들었을까. 문제의 투자사는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 최대의 사모 투자(private equity) 회사임을 자처하는 칼라일 그룹이다.




흥미롭게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한 이후 칼라일 그룹에 세간의 이목이 잔뜩 쏠려 있다. 이 회사가 빈 라덴 가문과 한때 투자 거래를 했을 뿐 아니라 부시 전 대통령과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 등 쟁쟁한 정계 거물들을 고문진으로 두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테러와의 전쟁 이후에는 더욱 성가를 높이고 있다.



빈 라덴 집안과도 거래…테러 전쟁 이후 성가 더 높여



칼라일 그룹은 1987년 카터 행정부 관리 출신인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이 변호사 친구 2명과 함께 창업한 일종의 사모(私募) 투자 기업이다. 사모 투자 기업들은 공개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는 회사나 저평가된 회사, 또는 경영난에 빠진 기업들을 인수해 흑자로 반전시킨 뒤 이를 되팔아 이윤을 챙긴다.


사기업이기에 전직 행정부 관리에 대한 로비 금지 규정도 적용되지 않는다. 도이치 자산 관리사의 수석 경제분석가인 스티븐 벨은 “기본적으로 사모 기업들은 언론의 각광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라고 말했다. 칼라일 그룹의 자체 홍보 자료에 따르면, 이 회사는 지난해 9월 말 현재 1백25억 달러가 넘는 투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워싱턴에 본부가 있고,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 55개 국에 4백35명 이상의 투자 상담가를 보유하고 있다. 이 회사는 항공·에너지·건강·정보기술·부동산·통신·미디어 등 사업 대상이 광범위하지만 주력 분야는 국방이다.



근래 칼라일 그룹이 부쩍 눈길을 끌게 된 계기는 지난해 9월27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기사 때문이었다. 당시 보도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과 관련해 국방비를 증액할 경우 예기치 않은 수혜자는 다름 아닌 빈 라덴 일가가 될 것이며, 그 이유는 빈 라덴 일가가 칼라일 그룹의 투자 고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보도는 부시 전 대통령과 베이커 전 장관, 칼루치 전 장관이 최근 몇 년 사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 있는 빈 라덴 일가의 본부를 방문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테러 주범 오사마는 자산 규모 50억 달러인 사우디 빈 라덴 그룹을 창업한 모하메드 빈 라덴의 자식 50명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오래 전 절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튼 사우디의 빈 라덴 그룹은 지난 1995년 칼라일 그룹 런던 지사를 통해 2백만 달러를 ‘칼라일 파트너 II 펀드’에 투자했다고 한다. 칼라일 그룹이 지난 10년간 연평균 34% 수익률을 기록했기 때문에 빈 라덴 그룹이 칼라일과 계속 거래했다면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칼라일 그룹은 오사마와 테러 사태의 연계설이 터지자 빈 라덴 그룹과의 거래를 완전히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대통령도 칼라일 그룹 이사 출신



부시·베이커·칼루치 등 정치 거물들이 당시 사우디의 제다를 방문한 까닭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시 전 대통령은 칼라일 그룹의 선임 고문이며 베이커 전 국무장관은 선임 자문관이다. 또 칼루치 전 장관은 칼라일 그룹 회장이다.


말하자면 세 사람 모두 칼라일 그룹의 업무와 관련해 제다를 방문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칼라일 그룹은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를 유럽 담당 회장으로 영입한 데 이어 필리핀의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 태국의 아르난도 판야라춘 전 총리, 독일 분데스방크(중앙 은행) 총재를 지낸 칼 오토 폴, 존 샬리카쉬빌리 전 합참의장, 아서 레빗 전 증권감독위원회 위원장, 아프사네 마세에키 전 세계은행 재무관 등 국내외 거물급 인사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부시 현 대통령도 1990년 칼라일 그룹이 소유한 기내식 공급업체인 케이터에어의 이사로 취임했던 적이 있다. 2년 뒤 텍사스 주지사에 당선된 부시는 이 회사를 떠났다. 칼라일 그룹의 스타 끌어들이기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들은 비록 은퇴했지만 정·재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현역 시절 못지 않다.



물론 이들 가운데서도 단연 화제의 인물은 부시 전 대통령이다. 그는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 현직 대통령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도 유형 무형의 힘을 발휘한다. <월 스트리트 저널> 보도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은 칼라일 그룹 사업 건과 관련해 1998년 11월과 2000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빈 라덴 그룹 인사들을 만났다.


이런 사실이 보도되자 부시 전 대통령은 비서실장인 진 베커를 통해 “두번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빈 라덴 가문과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공직 부패와 남용을 감시하는 공익 법률회사인 ‘주디셜 워치’는 언론 발표문을 통해 부시 전 대통령의 행위를 비난하고, 칼라일 그룹과 관련한 그의 활동 내역을 공개하라며 지난해 11월 법원에 소장을 냈다.


주디셜 워치는 칼라일 그룹의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부시 전 대통령이 사우디의 파드 국왕과 담소하는 사진이 지난해 3월5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리자 그의 행위가 미국의 중동 정책에 ‘이해 상충’을 가져올 수 있다며 칼라일 그룹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부시 전 대통령과 메이저 전 총리의 경우, 공개된 자료가 없어 칼라일 그룹측으로부터 얼마의 보수를 받는지 알 길은 없다. 지난해 10월31일자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메이저는 1년에 한달 정도 수고해 주는 대가로 10만 파운드 가량을, 부시는 1회 수고비로 8만~10만 달러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의 비영리 단체인 공직청렴센터의 피터 아이즈너 사무국장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칼라일 그룹처럼 사모 기업이 사업도 하고 돈도 벌고 현직 미국 대통령에게 조언도 하는 고문들을 두고 있다면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칼루치 전 국방장관 영입 후 연평균 34% 수익률





칼라일 그룹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유나이티드 디펜스 사이다. 버지니아 주 알링턴 사에 본부를 둔 이 회사는 칼라일 그룹이 1997년 8억5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이 회사는 현재 아라비아 해역에 배치된 미국 해군 함정에 장착된 수직 미사일 발사 체제 등 다양한 무기 체제를 만든 중견 군수 업체로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1990년대 후반 국방부와 최첨단 크루세이더 야포 체제 계약과 관련해 어려움을 겪어 왔으나 최근 이런 난관을 말끔히 극복했다. 테러 사태 이후 국방비가 대폭 증액되면서, 지난해 9월26일 마침내 국방부와 2003년 4월까지 6억6천5백만 달러에 달하는 크루세이더 납품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을 내린 사람이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인데, 그는 칼루치 칼라일 그룹 회장과 절친한 사이이다.



사실 칼라일 그룹이 본격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89년 칼루치 전 국방장관을 영입한 뒤부터인 것으로 알려졌다. 칼루치를 영입한 이후 지금까지 칼라일 그룹은 승승장구해 지난 10년간 연평균 34%라는 높은 수익률을 달성해 전세계 투자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칼라일 그룹 고객 가운데는 월가의 큰손인 조지 소로스도 포함되어 있다.


칼라일 그룹측은 회사 고문으로 있는 정계 거물들이 정부를 상대로 로비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크리스 울먼 대변인도 최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회사 차원에서 크루세이더 또는 다른 정부 계약과 관련해 어떤 로비도 벌인 적이 없다’며 칼루치 회장의 로비설에 펄쩍 뛰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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