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뒤흔드는 ‘재앙의 전주곡’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2.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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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선에서 ‘극우파 르펜’ 돌풍…파시즘 부활 우려
'일요일의 충격’ ‘또 하나의 프랑스 혁명’. 지난 4월21일 실시된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결과를 두고 유럽이 충격과 불안에 빠져들고 있다. 바로 이 날, 프랑스 국민전선(FN) 당수이자 유럽의 대표적인 극우파 정치인인 장 마리 르펜 후보가 당초 예상을 깨고 프랑스 대선의 결선 주자로 뽑히는 ‘이변’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선의 최종 결과는 오는 5월5일 실시되는 2차 투표에서 가려진다.




프랑스 대선 역사상 1958년 이래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한 이번 1차 투표에서, 르펜은 프랑스의 현직 대통령 자크 시라크(득표율 19.88%)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득표율은 16.85%. 시라크 대통령 밑에서 ‘역대 최장수 총리’를 지내며 차기 대권을 노리던 사회당 출신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이번 투표에서 16.18%를 얻는 데 그쳐 3위로 밀려났다.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1차 투표에서 한 후보가 총투표수의 과반수 이상을 얻지 못하면 1·2위 득표자만으로 2차 투표를 실시해 최종 당선자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르펜의 결선 진출이 ‘충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은, 그가 중도 우파와 함께 수십 년 동안 프랑스 정치를 양분해온 중도 좌파 후보의 진출을 아예 예선에서 막았다는 데 있다.

사회당은 1974년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대통령 후보가 중도 우파 지스카르 데스탱 후보와 결선에서 맞붙은 이래, 대통령 선거에서 한 번도 ‘결선 티켓’을 놓쳐본 적이 없다. 이번 대선에서도 전문가들은 시라크 대통령과 조스팽 총리가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결선에 진출해 자웅을 가릴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결과의 충격이 전유럽으로 확산되는 진짜 이유는 르펜 자신에게 있다. 그는 바로 유럽인들에게 제1·2차 세계 대전을 통과하며 뼈저리게 그 해악을 느끼게 한 ‘극단의 정치인’, 그 중에서도 전쟁과 대량 학살이라는 반인륜적 재앙에 책임이 있는 극우 정치의 계승자인 것이다.


식민지 독립운동 억압…유태인 학살 옹호


‘인종차별주의’ ‘외국인 혐오증’ ‘극단적인 자민족 중심주의’로 대별되는 르펜의 극우성은, 그의 전력과 정치 이력에 잘 나타난다. 그는 1950년대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지금의 베트남)와 알제리 등지에서 ‘프랑스의 영광’을 외치며 독립 세력을 억누르는 데 활약했던 공수부대 출신이다. 그는 1972년 자신의 정치 기반이 되는 국민전선 창당을 주도했다.


르펜이 프랑스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중반이었다. 왕당파·반유태주의자·카톨릭 근본주의자 등 비주류 집단을 끌어들여 범죄·실업률·이민자 문제를 집중 제기함으로써 기존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 뒤로 르펜은 인종주의적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1987년에는 나치 정권이 2차 세계대전 때 저지른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를 옹호하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범죄·실업·이민자 문제는 이번 대선전에서도 르펜 후보측 득표 전략의 주요 메뉴가 되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프랑스의 주택·일자리·사회 통합을 위해 불법 이민자들을 즉각 추방하라”고 외쳤으며, 실업 대책으로 일자리 알선과 직업 교육에 프랑스인을 우선 배려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또 지난 2년간 2배 이상 늘어난 범죄 건수를 내세워 시라크와 조스팽의 무능을 싸잡아 공격했다. ‘외국인 이민자가 문명을 위협한다’는 종래의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기는 발언 또한 잊지 않았다.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르펜 자신은 예상을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프랑스 국민과 유럽인 들은 르펜의 성공을 ‘재앙의 전주곡’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생들까지 나서서 연일 ‘반 르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조스팽 총리는 개표 결과 발표 직후, 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르펜을 거칠게 공격했으며, 시라크 대통령은 예정되었던 르펜과의 ‘텔레비전 토론’을 거부했다. 지난 4월25일 하루에만 파리·리옹·낭트·툴루즈 등 프랑스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30만명 이상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르펜의 파시즘적인 인종주의가 외국인 이민자가 4백만 명을 넘는 프랑스 사회에 분열과 갈등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극우 세력, ‘총선’에서 전면에 떠오를 수도


르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생각하는 프랑스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이처럼 프랑스 전역에 반 르펜 시위가 격렬하게 이는 까닭은, ‘르펜 돌풍’이 총선까지 이어지는 데 대한 우려 때문이다. 프랑스는 대선이 끝난 직후인 오는 6월 총선을 실시한다. 르펜이 대통령에 당선되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본선에서의 르펜 성적은 곧장 총선에서 국민전선의 성적으로 이어져 자칫 극우 세력이 전면에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같은 우려는 이웃 나라들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중도 좌파 세력은 유럽연합 15개국 가운데 13개국에서 집권당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중도 좌파는 오스트리아·벨기에·덴마크·이탈리아·포르투갈에서 집권당 자리를 우파에게 내주었다.

르펜의 출현은 나머지 나라에서도 연쇄 반응을 불러 유럽 전체의 우경화를 부르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대개 유럽의 강경 우파 세력은 유럽 통합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되면 유럽 각국이 몇 년 동안 공들여온 ‘유럽의 화합’도 깨질 수 있다고 유럽인들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가 지난 4월23일자 사설에서 르펜 후보의 대선 결선 진출을 ‘또 하나의 프랑스 혁명’이라고 지칭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의 중도 세력에게 ‘반성’을 촉구한 이 사설은 ‘유럽 좌우파 두 진영이 현재와 같은 마비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할 경우, 르펜 돌풍은 1789년 프랑스 혁명처럼 유럽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것’임을 경고했다.


당초 시라크의 재선이냐 조스팽의 소원 풀이냐로 관심을 모았던 프랑스 대선 구도는, 뜻하지 않게 등장한 극우파 변수에 따라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 프랑스 대선이 프랑스 국민은 물론이고 모든 유럽인에게 부활을 노리는 ‘파시즘 광기’와 맞서 싸울 의지가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대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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