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치대는 당신, 큰일 난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2.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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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핵무기 사용 포함한 ‘선제공격론’ 채택…이라크 등 ‘악의 축 국가’ 위험
1981년 6월7일 오후 5시30분께. 이스라엘 남부의 한 군사 기지를 발진한 14대의 전투기 편대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교외의 한 사막을 향해 저공 비행을 시작했다. 목표물은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을 염두에 두고 공사를 진행하던 오시라크 원자로. 완공을 앞두고 있던 이 원자로는 이 날 이스라엘 전투기들의 융단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이스라엘의 번개 같은 기습 공격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라크에 대한 공격은 자위 차원의 선제 공격이었다고 변명했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난했던 미국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선제 공격권을 외교 정책 수단으로 채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더구나 미국이 채택한 선제공격권은 재래식 무기는 물론 핵무기 사용까지 염두에 둔 포괄적인 공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이런 방침은 지난 6월1일 미국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부시 대통령에 의해 구체화한 것이다.




부시는 이 자리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테러리스트와 압제 정권의 위협 방지’ ‘강대국간 선린 관계 유지’ ‘자유스런 열린 사회 증진’ 등 3대 외교 과제를 제시했다. 그는 냉전 시절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역대 행정부가 펼쳐온 억지 정책은 “지킬 나라도 국민도 없는 그림자 같은 테러 조직망에게는 무용지물이다. 테러 위협이 가시화하기 전에 적의 기도를 분쇄해야 할 것이다”라며 선제공격론을 주창했다. 백악관은 선제공격론을 핵심 개념으로 도입한 국가안보전략(NSS) 문건을 올 여름 발표할 예정이다.


냉전 시대에도 없었던 혁신적 개념


부시가 제시한 선제공격론의 윤곽은 지난 3월 일부 언론의 특종 보도로 밝혀진 핵태세보고서(NPR)에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 <뉴욕 타임스>는 행정부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선제공격론을 공식 채택한 적이 없으며 이 순간 유지하고 있는 정책은 억지 정책이다’라고 보도해 당시만 해도 선제공격론이 외교 정책으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시사했다. 이런 어정쩡한 태도가 불과 3개월 만에 분명히 정리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선제 공격 목표는 이른바 악의 축으로 지목된 나라를 포함해 시리아·리비아 등 적성국의 핵·화학·생물학 무기나 생산 설비로서 재래식 무기의 공격에 끄떡없는 시설물이다. 물론 테러와 같은 돌발 상황이 전개되었을 때 공격한다.


선제공격론은 역사상 선례가 없는 혁신적 개념이다. 클린턴 행정부 때 국방부 부차관보를 지낸 커트 캠벨 박사는 “선제공격론은 완전히 새로운 전략 개념으로서 테러와 관련한 대통령의 독트린이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때 맥아더 장군이 중국에 대해 핵무기 선제공격론을 편 일이 있었는데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반대했다. 또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소련 선박을 공격할 것을 심각히 고려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두 사건 모두 냉전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미국은 냉전 시절 핵 억지 전략을 펼치며 소련과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해 왔다. 이 전략은 선제공격권을 유보한 채 미국 또는 소련이 상대방을 핵으로 공격할 경우 똑같이 핵 공격에 직면해 결과적으로 상호 파멸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그러나 양국은 억지 전략의 효용성을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선제 공격을 당할까 봐 핵무기를 대부분 지하 또는 잠수함에 보관해 왔다.


결국 냉전 시기부터 전임 행정부 때까지 유지되어온 억지 전략이 부시 행정부 들어 사실상 용도 폐기된 것이다. 또 국군 최고 통수권자인 부시 대통령이 선제공격론을 공식화한 이상 미군 수뇌부는 현재 추진 중인 무기 체제 개혁은 물론 군 개혁 작업도 이런 목표에 따라 진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부 외교 관측통들은 테러 사태 이후 ‘우리 편 아니면 테러주의자 편’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진 부시가 이른바 ‘정당한 전쟁론(Just War Theory)’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신학자인 조지 위겔은 “나라와 국민을 적의 위협에서 구출하기 위한 선제 공격은 정당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절박한 것이다. 정당한 전쟁론은 적으로부터 공격당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핵심이다”라고 설명한다.




돌이켜 보면 미국이 1980년대 이후 테러 조직망 또는 국가를 대상으로 공격에 나선 일은 있다. 그러나 당시 공격은 선제 공격이라기보다는 사후 보복 공격이었다. 이를테면 1986년 4월 미국은 미군 병사들이 자주 드나들던 베를린의 한 디스코테크 폭발 사건에 리비아가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자 리비아군 기지를 공격했다. 1993년 6월에는 이라크가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 암살 모의에 관여한 것으로 드러나자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있는 정보부 건물을 토마호크 미사일로 무차별 폭격하기도 했다. 1998년 8월에는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대사관 건물이 테러에 의해 폭발되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내 테러 훈련 기지와 화학무기 생산 의혹을 받던 수단의 한 의약품 공장에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국, 이라크 공습 쉽지 않을 듯


외교 관측통들은 부시 대통령이 선제공격론을 채택하게 된 직접적인 배경을 테러주의자와 대량 살상 무기 간의 연계성에서 찾고 있다. 즉 지난해 9월 테러 사건 이후 미국이 수천여 외국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된 상황에서 만일 테러 조직망에 핵무기나 화학무기 같은 대량 살상 무기가 흘러들어갈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부시는 이른바 악의 축 관련 국가들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시간 문제라고 보고 있어 서둘러 선제공격론을 제기했다는 분석도 있다.

부시가 지난 6월1일 연설에서 “위협이 완전히 눈앞에 드러날 때까지 우리가 기다린다면 그건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시간의 절박성을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선제 공격 대상에 오른 1순위 국가는 이라크다. 비록 부시 대통령이 연설에서 이라크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행정부 외교안보팀은 선제공격론이 최초 거론되기 시작한 지난 1월 하순부터 이라크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지목했다. 악의 축으로 지목된 북한도 이론적으로는 그 대상에 들지만 부시 대통령은 지난 2월 방한 때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공개 천명한 바 있다.


설령 이라크를 선제 공격 대상에 올려 놓는다 해도 미국이 실제 행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선 유럽의 미국 우방들이 일방 독주 식의 이라크 선제 공격에 일찌감치 반기를 든 상태다. 이라크 당국이 대량 살상 무기와 관련한 유엔무기사찰단 입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실제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나지 사브리 이라크 외무장관간 회담이 7월에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이라크를 테러 지원국으로 몰아붙여 선제 공격에 나선다면 아랍권의 반발은 물론이고 유엔의 지탄을 면키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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