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정책보다 투자가 전문?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2.08.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시 행정부 각료 대다수가 주식 부자…경제 위기에는 ‘강 건너 불 보듯’
요즘 미국 국민은 ‘테러와의 전쟁’은 안중에도 없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테러 사태 등에 대처하기 위해 신설하기로 한 조국안보부에 대한 홍보로 정신이 없지만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주식 시장에 쏠려 있다. 올 가을 중간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들도 공화·민주 가릴 것 없이 회계 부정 사태로 만신창이가 된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조처를 강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이처럼 국민이나 의회가 경제 문제로 연일 노심초사인데도 정작 백악관이나 주무 부처는 그다지 초조한 기색이 아니다. 백악관 경제팀은 아예 손을 놓은 듯한 인상이다. 주무 장관인 폴 오닐 재무장관조차 주가 하락으로 경제가 엉망진창인데도 최근 태연스레 아프리카와 러시아를 다녀왔다. 이런 장관에 대해 기자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부시는 “그에 대해 최고의 신임을 갖고 있다”라면서 오히려 두둔하고 나섰다. 대통령이 효율적인 시장 안정 대책조차 발표하지 못하는 주무 장관을 두둔하는 것은 부시 행정부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인 듯싶다.



미국 국민 과반수 “정부가 대기업 보호 앞장”



이런 상황에서 최근 <뉴욕 타임스>와 CBS 방송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이에 따르면, 작금의 경제 위기와 관련해 응답자 가운데 절반 이상은 부시 행정부가 대기업의 이해를 보호하고 있으며, 특히 응답자 중 3분의 2는 부시 행정부에 대한 기업들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이런 결과는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 다수가 전직 기업인 출신임을 감안할 때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회계 부정 사태에 따른 경제 위기와 관련해 부시 행정부의 대처 능력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왜 그런가. 최근 정부 감시 단체인 공직청렴센터가 밝힌 광범위한 자료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의 고위 공직자 100명 가운데 무려 34명이 기업인 출신이며 16명은 전직 로비스트 출신이다. 이쯤되면 부시 행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부인지 아니면 기업을 위한 정부인지 헷갈릴 만하다.



지난해 1월 부시 행정부가 출범했을 때 혹자는 이를 두고 ‘에너지 행정부’라고 꼬집기도 했다. 대통령과 부통령말고도 상무부의 도널드 에번스 장관과 캐서린 쿠퍼 차관을 포함해 각료 6명이 에너지 회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정부 내 최고위 관리 100명이 재산 증식 수단으로 가장 선호한 투자처가 주로 에너지 업체였으며 투자 총액이 1억5천여만 달러에 달했다. 단적인 예로 연초 법원에 파산 신청을 낸 거대 에너지 중개 회사 엔론에 투자한 고위 관리가 무려 14명에 달했다. 그 중 샤롯 비어스 국무부 차관과 칼 로브 백악관 수석자문관은 각각 25만 달러를 투자한 최대 주식 보유자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사실 현직 고위 관리들이 특정 회사 주식을 다량 보유하고 있으면 직업상 이해가 상충할 위험성이 상존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로브 백악관 수석자문관은 지난해 3월 인텔 사 중역과 로비스트들을 비밀리에 만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이 그 해 6월 밝혀지자 그는 약 10만 달러어치의 이 회사 주식을 처분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그는 인텔 사말고도 보잉·디즈니·GE·존슨&존슨·파이저 등 굴지의 기업들 주식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이들 회사의 대표들은 하나같이 백악관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전을 펼치던 상황이어서 그는 더욱 난처한 지경에 빠졌다.



부시 행정부가 종종 ‘기업인을 위한 정부’라는 말을 듣는 데는 고위 관리 상당수가 과거 자신들이 몸 담았던 기업들의 주식을 상당수 보유했거나 현재도 이들 기업의 로비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부처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장·차관급 고위 관리들이 전직 기업인 출신이다. 이를테면 오닐 재무장관의 경우 지난해 최고 5백만 달러 상당의 시티뱅크 주식을 보유한 것말고도 자신이 총수로 있던 알코아 사 주식도 무려 1억 달러어치를 보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 사령탑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 역시 기업과의 인연이 끈끈하다. 입각하기 전에 아메리카 온라인의 이사를 지냈던 그는 지난해 터키 보험 시장 등과 관련해 국무부를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벌인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그룹의 주식 상당액 외에도 굴지의 군수업체인 제너럴 다이내믹스 사의 주식을 5백만 달러어치 보유한 것으로 나와 있다.



정부 고위직에 기업인·로비스트 출신 우글우글



국방부 내 최대 투자가로 알려진 더글러스 페이스 국방차관은 국방부 용역업체 순위 43위인 AT&T 사 주식을 100만 달러어치 보유한 것말고도 루슨스·포드·GM, 버라이존 주식도 상당액 보유한 것으로 드러났다. 직속 상사인 도널드 럼스펠드 장관도 국방부 최대 용역업체 중 하나인 GE의 주식을 25만 달러어치 보유했던 것으로 드러났으며, 도널드 에번스 상무장관은 체니 부통령이 연루된 핼리버튼 사 주식 10만 달러어치 외에 마이크로소프트 사 주식도 25만 달러어치 보유했다.



이처럼 업계 주식을 보유한 관리들 다수는 한결같이 관련 업계와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었던 사람들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고위 관리 100명 중 이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이 20명이나 된다.




이들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끄는 인물은 현재 기업 회계 부정을 조사할 책임을 진 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의 하비 핏 위원장이다. 부시 대통령이 천거해 지난해 8월 의회 인준을 받은 핏 위원장은 과거 경력과 관련해 입방아에 오른 인물이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증권거래위원장에 취임하기 앞서 엔론 사 회계 부정을 방조한 것으로 드러난 아서 앤더슨 회계회사는 물론 최근 회계 비리로 말썽을 일으킨 일부 기업에서 일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부시 행정부에는 기업인 출신만 득실대는 것이 아니다. 기업과 공생하는 로비스트 출신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사가 니컬러스 칼리오 백악관 입법국장이다. 백악관에 들어가기 전 워싱턴 정가에서 최고 로비스트로 꼽혔던 그는 한때 무려 21개 업체를 상대했다. 그중에는 굴지의 투자 업체인 메릴린치와 주택융자회사인 파니매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회사는 지난해 백악관을 상대로 직접 로비를 펼치기도 했다. 그가 1999년 한 해 로비 활동으로 챙긴 수익은 무려 3백만 달러에 달했다.



기업인 출신에다 상당한 주식까지 보유한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들은 알짜 부자들로 이름이 높다.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을 포함해 15개 부처 장관의 재산 총액은 1억4천9백만~4억3천4백만 달러로 나타났다. 이같은 액수는 전임 클린턴 행정부 각료들의 재산 총액(1천4백50만∼4천5백90만 달러)에 비하면 무려 10배나 많다.



이들 중 재산 순위 1위는 입각 전 화학업체인 카보트 사 회장을 지낸 새뮤얼 보드먼 상무부 부장관. 그는 1억6천4백만 달러 상당의 카보트 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2위는 최고 1억3천5백만 달러 상당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럼스펠드 국방장관, 3위는 약 1억1천만 달러의 재산을 보유한 오닐 재무장관이다. 보드먼 부장관과 마찬가지로 럼스펠드와 오닐 장관도 현물 재산보다는 과거 자신들이 몸 담았던 회사의 주식이 많다.



“석유회사 출신 갑부들이 백악관 장악”





각료급 인사들의 재산 운용 방식도 가지가지다. 이를테면 크리스틴 위트먼 환경청장은 모두 12개 투자업체에 68만 달러를 맡겨 대리 운용하고 있다. 반면 로버트 죌릭 무역대표부 대표는 버뮤다에 소재한 사우디아라비아 재력가 출신이 운영하는 투자사인 사이드 홀딩 이사를 지내며 투자기법을 터득해 그 자신이 직접 돈을 운용한다. 또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자신의 이름을 딴 D.H.R.라는 일종의 자선 재단을 만들어 5백만~2천5백만 달러 상당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미국 경제가 MS·시스코·오라클·인텔·델 컴퓨터 같은 첨단정보통신 산업 덕택에 호황을 누리면서 많은 국민들이 주식 투자를 통해 재미를 보았는데 부시 행정부 고위 관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그들의 기술주 투자 총액은 7천4백60만 달러, 투자 종목 수도 6백17개에 달했다. 특히 캐네스 댐 재무부 부장관은 뮤추얼 펀드로 최고의 인기를 끈 뱅가드 펀드에 무려 1천3백만 달러 상당을 투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부 비판자들은 ‘지금의 백악관은 석유회사 출신 갑부 2명이 전직 석유회사 중역들과 기타 백만장자 기업인들로 진용을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고 혹평할 정도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작금의 회계 부정 사태에 따른 경제 위기와 관련해 부시 행정부가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