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 패권주의 살판 났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on@sisapress.com)
  • 승인 2002.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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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무역촉진권한’ 의회 통과…무차별 시장 개방 공세 펼 듯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는 것은 물론 노동자와 농민, 나아가 경제에 매우 중요한 자유무역협정들을 갖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대외 무역협상 권한을 대폭 강화한 법안이 하원에 이어 상원에서도 통과된 뒤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의기양양해 한 말이다.



부시 대통령이 염원하던 이 법안의 공식 명칭은 ‘무역촉진권한’(TPA) 법안이다. 이 법안은 대통령에게 대외 무역 협상을 신속하게 타결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고 해서 ‘신속처리권’이라고도 불린다. 3백4쪽에 이르는 이 법안의 핵심은 한마디로 대통령이 주도권을 쥐고 신속히 대외 무역 협상에 나설 수 있도록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미국 헌법은 관련 국내법에 저촉되는 대외 무역 협상안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다. 또 의회는 그 과정에서 협상안을 수정할 권한을 갖는다. 그러나 무역촉진법은 의회에 수정 행위를 허용하지 않고 오직 가부 의결권만 부여한다.



“해외 시장 파고들어 경제 부흥”



이처럼 번거로운 의회의 견제 절차를 거치지 않는 만큼 행정부로서는 협상안에 대한 신속한 집행을 기대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94년 1월 발표한 북미자유협정이나 그해 말 발효한 세계무역기구안이 모두 신속히 출범할 수 있었던 것도 신속처리권이 발동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대통령 권한은 포드 행정부 때인 1974년부터 1994년까지 행사되어 왔지만, 1994년 클린턴 대통령이 내놓은 신속처리안 연장안이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에 의해 거부되었다.



무역촉진권한 법안이 발효할 경우 미국과 교역하는 전세계 모든 나라는 더욱 거센 시장 개방 압력에 직면하게 될 것 같다. 이번 법안의 주목적이 대외 시장 전면 개방을 통한 미국 경제의 부흥에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젤릭 무역대표부 대표는 “신속처리권이 잠자고 있던 지난 8년 동안 미국은 세계 다른 나라에 비해 처져 왔다”라고 천명한 것도 앞으로 무차별 시장 개방 공세가 펼쳐질 것임을 예고한다.






워싱턴 국제경제연구소의 제프리 쇼트 연구원은 “무역촉진권한을 무기로 젤릭 대표는 쌍무 무역협정은 물론 지역간, 나아가 범세계적 무역협정 타결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경제 성장은 내수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지만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4분의 1이나 된다. 또 수출업에 종사하는 근로자가 1천2백만명이나 되며 이들 대부분은 고용 인원 5백명 미만의 중소기업에서 일하고 있어 부시 행정부는 이런 기업들을 위한 해외 시장 개척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번 법안에는 미국내 시장 개방에 따라 피해를 볼 노동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보호주의 조항도 따로 포함되어 있다. 그 골자는 앞으로 10년간 1백20억 달러를 조성해 무역 개방으로 인한 피해자들에게 직업 훈련 수당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이들의 소득 가운데 최고 65%까지 세금을 감면해 의료보험 비용으로 보조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외 시장 개방을 위한 공세를 무차별적으로 펼치려면 형평상 미국 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피해를 볼 노동자들에게 나름의 보호주의 정책을 펴겠다는 속셈이다.



자동차·IT·서비스 등 5대 분야 집중 공략



부시 행정부는 이번 무역촉진권한 법안이 발효하는 대로 우선 칠레나 싱가포르와 쌍무적인 관세자유협정을 체결할 방침이다. 이를테면 칠레에 18만 달러짜리 미국 케터필러 사 공작기계 한 대를 수출할 경우 8% 수입 관세인 1만5천 달러 정도를 물어야 하지만, 브라질에서 생산된 똑같은 제품을 칠레에 팔 경우 수입 관세는 2%인 3천7백 달러에 불과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칠레는 브라질과 호혜관세협정을 맺고 있지만 미국과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부시 행정부는 밀·식용유 등 농산품, 나아가 도로포장 장비나 중기계 등을 내다 팔 만한 시장으로 이미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지목한 상태다. 나아가 캐나다·멕시코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기초로 다른 미주 국가들을 모두 아우르는 미주자유무역협정(FTAA)을 늦어도 2005년까지는 타결할 방침이다.



현재 미국이 대외 시장 개방의 중점 대상으로 지목한 분야는 크게 다섯 가지. 우선 자동차 시장을 들 수 있다. 현재 자동차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노동자는 1백20만명을 웃돈다. 미국 자동차 업계는 1996년 해외에 2백44억 달러어치의 자동차 완제품 판매를 기록한 뒤 올해까지 연평균 5%씩 판매량을 늘리겠다고 계획했다. 대륙 별로는 1990∼1995년 무려 65% 판매 성장률을 보인 아시아를 집중 공략한다는 전략이며 2005년까지 60% 성장을 목표로 삼고 있다.






제조업 분야도 시장 개방 압력 핵심 대상이다. 이 분야 노동자는 약 1천9백만명인데 1960년대 초만 해도 국내총생산 중 제조업 수출이 차지한 비율이 4%에 불과했지만 오늘날 13%를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미국이 전세계를 선도하는 정보통신 기술 분야 역시 부시 행정부가 대외 시장 개방과 관련해 눈독을 들이는 분야다.


이 분야에 직·간접으로 종사하는 노동자가 3백50만명에 달하는데, 미국은 반도체 및 반도체 생산장비 등에서 월등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다. 또 다른 개방 대상 분야는 서비스와 농산물이다. 약 3백90만명이 종사하는 서비스 분야의 경우 미국은 특히 신흥개발국가의 개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중국·타이완에 대한 미국의 서비스 수출 증가율은 약 30%에 달했고 홍콩과 아르헨티나에서도 20%를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농산물 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농산물은 전세계 농업 무역 거래량 가운데 22%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큰데, 올해 수출량은 약 5백4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수출에 의존하는 미국 농업 인구는 약 75만명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50개 주에 고루 퍼져 살고 있어 정치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이처럼 ‘미국 경제 제일주의’에 초점을 둔 이번 법안은 단순히 해외 시장 개방뿐 아니라 미국의 세계 경제 패권 전략과도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지적된다. 부시 행정부가 미국이 21세기에도 세계 경제의 지도력을 유지하려면 무역촉진권한 법안이 필수라고 주창해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농업이나 철강 분야에서 보호주의 성향을 보여온 부시 행정부가 신속처리권을 무기로 삼아 대외 시장 개방 압력을 무차별로 펼칠 경우 해당국과 거센 무역 마찰을 빚게 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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