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민주화에 열외는 없다”
  • 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cspyuon@sisapress.com)
  • 승인 2002.09.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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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친미 국가에까지 ‘민주주의’ 밀어붙여…사우디·이집트 저항 거셀 듯


오랜 세월 아랍의 인권 유린과 민주화 탄압에 의도적으로 침묵해 온 미국이 최근 친미 아랍국인 이집트를 겨냥해 포문을 열었다. 이집트의 저명한 민주화 운동가인 사드 에딘 이브라힘(63)이 지난 7월 하순 국가모독죄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대학 교수인 이브라힘은 학생들에게 민주적 가치들을 가르쳐왔고 선거 때마다 투·개표 감시단을 구성했다.

그런데 2년 전 그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자신의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할지 모른다는 ‘설’을 퍼뜨렸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미국이 이집트가 이브라힘을 석방하는 등 인권 개선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추가 원조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이집트는 ‘할 테면 해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과거 이브라힘 사건보다 훨씬 심각한 인권 탄압 행위가 이집트에서 벌어져도 아무 말 못하던 미국이 이처럼 이례적인 강경 조처를 취한 까닭은 무엇인가. 미국 외교 전문가들은 그 해답을 아랍 문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인식 변화에서 찾고 있다. 그 하나는 중동 평화와 관련되어 있다. 수십 년간 유혈 사태로 얼룩져온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면 지금 같은 식의 평화 중재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 가치들을 주입해 아랍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테러리즘 차단 위한 마지막 카드


그 첫 대상으로 부시는 지난 6월 하순 팔레스타인을 지목했다. 당시 중동 평화와 관련한 연설에서 그는 팔레스타인 국민에게 종신 대통령 격인 야세르 아라파트 대신에 새로운 지도자를 민주 절차를 통해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나아가 그는 아랍권 전체를 향해 3권 분립에 기초를 둔 책임 있는 정부, 독립적인 사법부, 권한과 책임이 분명한 보안 기관, 시장 경제 채택 등 팔레스타인 민주화를 위한 4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부시의 이런 요구는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요르단 등 중동 평화의 주요 이해 당사국들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처럼 ‘아랍 민주화’ 카드를 꺼내든 근본적인 이유는 작금의 테러 전쟁 수행과 직결되어 있다. 후버 연구소의 제임스 노이스 연구원은 “미국은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알제리 같은 아랍 정권의 속성상 이슬람 극단주의가 발흥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9월 테러 사태를 겪은 뒤 미국은 테러리즘의 원천이 되어온 이슬람 극단주의를 차단하기 위한 대안으로 아랍의 민주화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사상 유례없는 테러 사태의 범인 19명이 모두 아랍인으로서 극단적 회교 원리주의에 빠진 반미·반이스라엘 행동 대원임을 확인한 뒤 부시 행정부는 아랍 민주화 요구를 더이상 늦추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현재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이라크 후세인 정권 거세 못지 않게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전통 우방의 민주 개혁도 중요한 과제로 간주하고 있다. ‘이슬람 극단주의는 곧 테러리즘의 온상’이라는 확고한 인식에 도달한 부시 행정부는 친미 국가든 반미 국가든 궁극적으로는 아랍권 전체를 민주 사회로 변혁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본산 사우디가 ‘골칫거리’


이와 관련해 현시점에서 가장 골치를 썩이는 나라는 미국과 전통적인 우방 관계를 유지해온 사우디아라비아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공개적으로 독재 왕조 사우디의 열악한 인권 상황과 억압된 민주주의를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오히려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이후 최근까지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이나 민주화 따위는 관심 밖이었고 군사 동맹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만 주력해왔다. 현재도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미군 4천여명이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테러 사태를 일으킨 범인 19명 가운데 무려 15명이 사우디 출신으로 알려진 뒤 사우디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은 예전처럼 호의적이지 않다. 여기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난해 9월 테러 사태 이후 미국의 탈레반 공격을 명시적으로 지지한 적이 없을 만큼 미국의 반테러 전쟁 수행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최근 미국 국방부가 주최한 비공개 세미나에서 브리핑 책임자로 나온 랜드 연구소 연구원은 테러리스트와 연계된 사우디를 미국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해 충격을 주었다.

이런 사실이 보도된 직후 부시 행정부는 공식 입장이 아니라며 해명에 나섰지만, ‘테러 배후국 사우디’라는 인식은 급속히 퍼져가고 있다. 영향력 있는 보수 논객인 윌리엄 크리스톨은 “미국은 테러리스트 보호와 테러 자금줄 역할을 하는 사우디에서 권력 변화를 꾀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불과 얼마 전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반사우디 감정이 고조되면서 약 8천억 달러로 추산되는 미국 내 사우디 왕족들의 투자액이 지난 몇 달 사이에 6천억달러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부시 행정부가 사우디와 관련해 특히 우려하는 것은 이 나라에 뿌리 깊이 퍼져 있는 극단적 이슬람 원리주의이다.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사우디는 이슬람 원리주의 종파인 ‘와히비즘’의 최후 보루이다. 극단적인 반서방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와히비즘은 오랜 세월 사우디 왕족은 물론 일반 국민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군림해 왔으며, 사우디뿐 아니라 여타 아랍국의 원리주의자들에게도 숭배 대상이다. 미국은 절대 다수 사우디 국민이 ‘9·11 테러’ 배후 인물로 꼽힌 오사마 빈 라덴에게 동조하는 까닭도 와히비즘에 젖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최근 미국 정부가 비밀 여론조사를 해본 결과 사우디 젊은이 가운데 95%가 빈 라덴의 대미 전쟁 선포에 동조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는 원유 공급 안정과 중동 평화를 위해 사우디와 전략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슬람 극단주의의 본산인 사우디에 대해 민주화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지만 뾰족한 해답은 찾지 못한 상태이다. 대다수 외교 전문가들은 부시 행정부가 일단 테러와의 전쟁 명목으로 ‘아랍 민주화’ 카드를 내밀기는 했지만 시행 과정에서 해당국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히리라고 보고 있다.

무엇보다 이집트·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 등 친미 아랍국 지도부는 미국의 요구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 민주적 방식에 의한 투표가 행해질 경우 온전히 자리를 보전할 지도자는 전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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