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스트리트에 비상구는 없는가
  • 뉴욕 · 월스트리트 · 정창래(자유 기고가 ()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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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연속 증시 하락 등 사상 최악 고전…투자 자본 ‘썰물’, 대규모 정리 해고 바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불과 5∼6년 사이에 천상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미국의 증권가는 날개가 없어 보인다. 월 스트리트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증시가 3년 연속 하락하기는 1939∼1941년 이후 처음이다. 경기 침체와 증시 불안정으로 수많은 투자자가 손실을 보았으며 그 여파로 주식 시장에 몰렸던 투자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투자 서비스 회사들의 이윤도 대폭 줄어 대규모 정리 해고가 잇따르고 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언론과 투자자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증권가의 스타 애널리스트들과 펀드 매니저들은 이제 비난과 원성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1998년부터 헤지 펀드를 운영해온 마이클 케리스(31)도 대박을 노리던 월 스트리트 맨이었다. 친척과 친지 22명으로부터 출자를 받아 자신이 뉴욕 브루클린에 세운 케리스 캐피털 매니지먼트 사 이름으로 ‘수백만 달러’ 규모의 펀드를 관리했다(케리스는 정확한 액수를 밝히기를 거부했다). 미국에서 운용되는 헤지 펀드의 평균 규모가 5천만 달러인 것을 감안할 때, 그의 펀드는 비록 작은 규모지만 초기부터 재미를 보았다. 주로 신규 벤처 기업 위주의 기술주에 투자해 1999년과 2000년에는 각각 100%의 순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케리스의 헤지 펀드는 2001년 이후 이른바 ‘신경제’ 거품 붕괴로 수백만 달러를 잃었다. 자신이 투자한 100만 달러도 날아가 버렸다. 다른 헤지 펀드가 입은 손실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케리스는 투자자들에게 손해를 끼쳐 마음이 아주 무겁다고 했다.



헤지 펀드를 풀타임으로 관리하던 케리스는 펀드 수익성이 폭락해 자신의 수입 또한 바닥을 치자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몇 개월 구직 노력 끝에 케리스는 맨해튼에서 MH 캐피털의 헤지 펀드 관리자 밑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새 직장에서는 컴퓨터 하나 달랑 올려놓은 작은 책상 앞에서 훨씬 적은 봉급을 받으며 일하게 되었지만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자기보다 더 화려한 경력을 지닌 친구들이 몇 달째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정도로 직장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9월 초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신규 실업자들의 실직 수당 신청이 4개월 동안 최고치인 42만6천 건이었다. 이른바 화이트 칼라라고 하는 고학력 전문직의 실직률은 블루 칼라 인력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지난해부터 몰아닥친 증권가의 정리 해고 바람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메릴린치나 찰스 슈왑 등 월 스트리트의 대표적인 투자 브로커 회사들은 이미 지난 2년 동안 25%가 넘는 직원을 해고했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모건스탠리의 한 부사장은 모건스탠리도 올해가 끝나기 전에 천명 이상을 해고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모건스탠리 사는 올해에 이미 4백명을 ‘조용히’ 정리했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골드먼삭스 사는 3/4분기의 손익 계산을 토대로 올해 더 많은 수를 정리 해고할 것이라고 9월25일 발표했다. 골드먼삭스는 이미 지난해에 2천8백명을 해고했다. 3/4분기 수익률이 2/4분기보다 11%나 증가했는데도 말이다.






투자 은행가·M&A 전문가가 ‘집으로’ 1순위



정리 해고 바람을 탄 직종은 기업의 주식 상장을 돕는 투자은행가(Investment Banker)들과 합병·매수 전문가들이다. 2000년부터 새로 주식을 상장하는 기업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물어지고 1990년대 중반부터 활발하던 합병·매수 협상도 뚝 끊겼다. 이제는 많은 업체가 정리된 마당이어서 기업이 높은 연봉을 지급하며 투자은행가들과 합병·매수 전문가들을 데리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증시 호황 때 많은 증권 회사가 신규 인력을 채용했으나 이제는 수입이 급감해 수익성 없는 부서의 인력은 대폭 정리해야 할 형편이다.



투자 은행 전체가 날아간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보스턴에 본부를 둔 플리트 보스턴 파이낸셜 사는 몇몇 유망한 사업에 주력하기 위해 자회사인 로버트슨 스티븐스 투자은행을 매도하려고 했으나 마땅한 매입자가 나타나지 않자 아예 회사를 공중 분해시켜 버렸다. 1970년대에 설립된 로버트슨 스티븐스 사는 인터넷 닷컴과 테크놀로지 회사들이 다투듯 주식을 상장할 때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꽤 높았던 웹밴·이 토이스·팜·이 머신스 같은 굵직굵직한 업체들을 상장시킨 투자은행이다. 올해 7월에 내려진 이 결정으로 로버트슨 스티븐스 사의 애널리스트·세일즈·포트폴리오 매니저 등 직원 9백50명이 직장을 잃었다.



이러한 정리 해고 바람은 1998년 주가 폭등이 시작될 때 이미 예견되었다는 의견도 자주 나오고 있다. 미국 증시 역사에서 1998∼2000년의 폭발적인 성장세는 유례가 없는 ‘비정상적인’ 사건이었고, 과도한 증시 투자 붐이 제풀에 꺾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는 것이다.



현재 증권사들의 수입 규모는 1997년 수준으로 떨어진 반면 채용 규모는 아직 1999년 수준이라고 한다. 따라서 조만간 증시가 다시 활성화하지 않는다면 정리 해고 바람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월 스트리트 7년차 로버트 힌치클리프(35)에게는 지금의 현실만으로도 이미 벅찬 상태이다. 스페인계 다국적 은행인 방코 산탄더 뉴욕 지점에서 남미의 테크놀로지 업계 애널리스트로 일하던 그는 지난 2월에 해고당했다. “담당하던 기업들이 하나 둘씩 없어지더라”고 그는 말했다. 할 일이 없어진 셈이다.






“ 담당하던 기업들이 하나 둘씩 없어지더라”



대다수 회사에서 감원 대상자들은 불시에 해고를 당한다. 불필요한 잡음을 줄이기 위하여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우기 때문이다. 퇴직금은 보통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을 준다. 하지만 경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올해에는 6개월치를 준다고 한다. 다행히 힌치클리프는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받아서 아직 생활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직장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다시 남미의 테크놀로지 업계 담당 애널리스트로 일하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는 “12월까지 직장을 구하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내년 2월까지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 가봐야 알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난감하기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연방 정부에서 경제분석가로 3년 동안 일하다가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 석사(MBA) 과정을 시작한 1학년생 세라 세너토어(25)는 경기 침체를 학교에서 피하고 있는 경우이다. 졸업 후 부동산 업계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그녀는 졸업하는 2004년까지는 경제가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자신을 고생만 실컷 한 전직 애널리스트라고 소개한 2학년생 오머 모하메드(32)는 열악한 취업 환경에서도 학교가 졸업생들의 취직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있어 크게 걱정은 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현재의 증시 상태로 6개월 후 경제를 가늠할 수 있다는 월 스트리트의 속설에 비추어 볼 때 2003년 졸업생의 취업 전선에도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세너토어가 전업하기를 원하는 부동산 업계도 벌써 부동산 거품 괴담으로 떨고 있다. 증시 불황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전망도 관계자마다 대답이 다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성장 국면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던 대다수 거물급 증시 분석가들은 이제 2003년 중반까지 불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고 있다.



테크놀로지 거품 이전부터 강세론을 펼쳐 한때 ‘예언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던 골드먼삭스의 에비 조지프 코헨은 투자자들에게 지금이 주식을 매수할 황금 찬스라고 주장한다. 모건스탠리의 스티븐 로시는 현재의 미국 경제를 10년 전 일본 경제에 비유하며 더블딥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활동하는 독립 애널리스트 제프 케이건 같은 이는 미국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서려면 적어도 6∼8개월 동안 안정이 우선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거품 붕괴, 9·11 테러, 속속 드러나는 거대 기업들의 회계 장부 조작, 이라크와 전쟁을 하려는 부시 정부 등 불확실성의 암초는 언제든 증시와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미국 경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해답은 미국 밖에서 찾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경제는 생산성의 산물이다. 생산성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몇몇 벤처 기업들이 주도한다”라고 샌프란시스코 소재 블루 프린트 벤처 캐피털의 바트 샥터는 말한다. 인텔·애플 컴퓨터·델 컴퓨터 역시 벤처 기업들이었다고 지적하는 그는 2년 전부터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아시아의 통신 테크놀로지 시장을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은 이제 미국보다 신기술 수용도가 훨씬 높다. 초고속 네트워크와 무선 네트워크는 미국보다 더 보편화해 있다. 우리는 NTT 도코모·삼성·LG 같은 기업들이 생산하는 신제품들을 통해 미국 시장에 대한 전망을 할 수 있다고 본다”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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