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농민’ 굶어 죽게 생겼다
  • 토론토·성우제 (자유 기고가) (wootje@sisapress.com)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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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체 농간·공급 과잉으로 값 폭락…옥스팜, 공정 거래 운동 펼쳐



지난 9월18일 오전 캐나다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토론토 대학 교정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몇몇 사람들이 ‘MAKE TRADE FAIR(거래를 공정하게)’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커피를 한 잔씩 건네주었다. 커피 회사가 주최하는 시음회 같기도 했지만, 공짜 커피 한 잔에 담긴 의미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9월24일 오후 6시 토론토 서남쪽 론세스벨즈 거리에 있는 커피점 ‘얼터너티브 그라운즈’에서는 니카라과에서 온 한 중년 여성이 두 시간 가까이 열변을 토했다. 블랑카 로사 몰리나라는 이 여성은 “나는 지금 커피 농사를 짓고 있으며, 커피 농민을 살리는 ‘페어 트레이드(Fair Trade)’에 힘쓰고 있다. 커피 선진국 소비자들이 페어 트레이드에 좀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호소했다.



9월18~25일 토론토의 다른 대학과 거리에서도 페어 트레이드 커피와 관련한 각종 행사가 열렸다. 캐나다의 토론토·퀘벡뿐만이 아니다. 같은 기간에 영국·아일랜드·독일·벨기에·네덜란드·스페인·인도·호주 등지에서도 역시 같은 주제를 내건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지난 4월11일에는 다섯 대륙 25개국에서 커피의 공정한 거래를 요구하는 이벤트가 마련되어 커피를 마시는 이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커피 페어 트레이드 행사는 앞으로 훨씬 더 자주, 갈수록 강도 높게 열리게 될 것 같다.



커피 한잔 가격의 1%만 농민에게 돌아가



전세계에서 진행된 이 행사의 주체는 옥스팜(OXFAM·Oxford for Famine Relief)이다. 1942년 ‘빈민 구제’를 목표로 설립되어 세계 11개국에 지부를 둔 이 단체는 최근 커피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커피 농사를 짓는 세계 70여 나라 농민 대부분이 빈민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비극은 공급 과잉에서 말미암았다. 이를테면 1997년 5월 1파운드당 3.05 달러 하던 커피가 2002년 수확기에는 0.50 달러까지 떨어졌다. 말 그대로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보았자 이익은커녕 생산 비용도 건지지 못할 정도로 커피콩(Green Bean) 가격이 폭락한 것이다.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인 커피 속에 농민의 땀과 피와 한숨이 담겨 있는 셈이다. 게다가 커피의 유통 경로가 워낙 복잡해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잔 가격의 단 1%만이 농민에게 돌아갈 뿐이다.



과테말라 커피 농민 블랑카 로사 몰리나 씨에 따르면, 과테말라에서는 올 한해 이미 3만여 커피 농가가 가난을 못이겨 고향을 등졌으며, 30만명이 북쪽 수도 인근으로 몰려가 정부의 구호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과테말라 정부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옥스팜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티나 콘론 씨는 “중앙아메리카·아프리카·아시아에 걸쳐 2천5백만명이 넘는 커피 농민이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라고 강조했다. 커피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기호 식품으로 떠오른 이래, 지금과 같은 위기를 맞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옥스팜 관계자들은 그 원인을 두 가지로 꼽는다. 먼저 세계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이 커피 생산국들에 커피를 무조건 많이 생산하라고 독려했기 때문이다. 커피를 생산하는 나라들은 이상하게도 한결같이 가난한 개발도상국(78쪽 상자 기사 참조)인데,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공급 과잉이 초래할 위기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트남, 브라질 이어 2위 생산국으로 떠올라



그 결과 지난 10년 사이에 수십 년 동안 움직일 줄 모르던 커피 생산국의 순위까지 뒤바뀌었다. 생산량에서 10위권에도 들지 못하던 베트남이 최근 브라질에 이어 2위로 떠올랐다. 베트남 같은 ‘스스로도 원치 않는 신데렐라’가 탄생했으니, 커피 가격이 끝없이 추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옥스팜 관계자들이 꼽는 두 번째 원인은, 세계적인 커피 회사들의 ‘농간’이다. 옥스팜은 문제의 대형 커피 회사들을 이른바 ‘빅4’로 꼽았다. 전세계 커피 콩 유통량(커피는 세계적으로 석유 다음으로 유통량이 많다)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는 네슬레·사라리·프록터앤갬블·크래프트가 가격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는 얘기이다.


세계 커피 산업의 ‘빅4’는 생산자들로 하여금 ‘제살 깎기 경쟁’을 하도록 부추겨 가장 값싼 커피를 구입한 뒤, 구미나 일본과 같은 이른바 대형 커피 소비국에는 평소와 같은 가격으로 넘겨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커피 생산자들은 자녀들을 학교와 병원에도 보내지 못하는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반면, 커피 유통·가공 업체들은 사상 최고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다. ‘커피 농민 돕기 운동’을 강력하게 펼치는 옥스팜은, 이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에게 ‘빅4’에 항의 메일을 보내거나 전화를 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옥스팜이 커피 농민을 돕는 장기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대안으로 꼽는 것이 바로 페어 트레이드이다. ‘공정한 거래’를 뜻하는 페어 트레이드는 세계 커피산업의 불공정한 거래를 바로잡자고 나선 일종의 ‘세계 커피 시민운동’의 이름이다. 1988년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유럽과 북미, 일본 등 17개국으로 퍼져나갔고 최근에는 코코아·꿀·주스·설탕·차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 운동이 지향하는 것은 간단하다.


이른바 ‘코이요테’라 불리는 지역 중간 상인과 대규모 커피 유통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커피를 직접 볶아 파는 작은 커피점 10여 개가 연합해 생산지의 농민 연합체와 직거래한다는 점이다. 세계의 커피 가격은 보통 ‘뉴욕 스톡 익스체인지’에서 결정되는데, 페어 트레이드는 여기에도 구애될 필요가 없다.



1998년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처음으로 페어 트레이드 운동에 가담한 얼터너티브 그라운즈의 린다 번사이드 사장은 “페어 트레이드는 커피 시장에서 사회적·경제적 불의를 깨뜨리는 운동이지 자선 사업은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페어 트레이드가 전통적인 ‘언페어 트레이드’와 다른 점은, 커피 구입 비용을 농민에게 미리 지급해 최저 생계비를 우선 보장해 준다는 것이다. 페어 트레이드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소규모 커피점 공동체가 소규모 농민 공동체와 지속적으로 거래해서 발전을 함께 도모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페어 트레이드는 일종의 환경운동”



커피점 얼터너티브 그라운즈의 린다 번사이드 사장의 말처럼 페어 트레이드는 일종의 환경운동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페어 트레이드 덕분에 커피 산지에서 전통적인 커피 재배 방식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국에서 비료와 농약을 치지 않은 쌀이 인기를 끌 듯, 구미에서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재배한 커피가 소비자들로부터 환영받고 있다.



세계 커피 시장에서 아직까지는 큰 힘을 쓰지 못하지만(캐나다에서는 전체 커피 소비량의 1%), 페어 트레이드 운동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 대구에 있는 커피점 ‘커피명가’ 안명규 사장은 지난 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식품전(SACA)에서 페어 트레이드 부스를 처음 보았다고 말했다. “전반적으로 콩이 좋아 보였고 운동 자체에 힘이 넘쳤다. 좋은 콩 구하는 것이 커피 업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고, 무엇보다 명분이 뚜렷한 만큼 기회만 된다면 페어 트레이드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미국의 한 작은 도시에서는 시민이 투표를 해 그 도시 커피점들이 페어 트레이드 커피만 쓰도록 하자고 결의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인터넷(www.maketradefair.com)을 통해 전세계 커피 소비자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는 옥스팜은 올 10월부터 좀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활동에 돌입한다. 먼저 질 낮은 커피를 시장에서 추방함으로써 커피 공급을 원활하게 한다는 프로그램을 가동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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