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휩쓰는 덩샤오핑 열풍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08.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 열풍…찬양 일변도 회고행사 줄이어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중국 대륙에 열풍이 불고 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불기 시작한 덩샤오핑 바람은 8월 말이 되자 절정에 이르고 있다. 신화사(新華社)·런민르바오(人民日報)·지에팡쥔바오(解放軍報) 등 중국을 대표하는 관영 매체들은 그의 탄생일인 8월22일을 전후해 ‘탄신 100주년 기념’ 특집물을 쏟아냈다.

내용은 물론 찬양 일색이다. 런민르바오는 8월21일, 중국 개혁·개방의 기초가 된 ‘덩샤오핑 이론’을 재조명하는 기사의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8월22일은 평범한 날짜이면서, 동시에 비범한 날짜이다. 이 날이 평범한 이유는 매년 같은 날이 돌아오기 때문이며, 이 날이 비범한 이유는 세기의 위대한 인물 한 분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바로 덩샤오핑의 탄생일인 것이다.’

런민르바오는 이어, 덩샤오핑이야말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자였을 뿐 아니라, 실사구시로 대표되는 그의 이론은 ‘시대의 선택이자 요구로서, 덩샤오핑이 중국 인민에게 물려준 유산 가운데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신화사의 보도 역시 다르지 않다. 신화사의 인터넷판 ‘신화왕’은 최근 덩샤오핑의 주요 업적과 생애, 저작은 물론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념 행사 등을 한데 묶은 별도의 블록을 마련했다. 이 중 덩샤오핑의 일생을 소개한 ‘덩샤오핑 동지의 빛나는 전투적 일생’이라는 기사는 본격적으로 그의 업적을 묘사하기에 앞서, 덩샤오핑을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지도자(영도인), 중국 사회주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의 총설계사’로 치켜세웠다.

적어도 이 기사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81년 덩샤오핑이 발표한 유명한 보고서 <건국 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 문제 결의> (흔히 ‘역사 결의’로 부름)를 소개하면서, 덩샤오핑이 <역사 결의>를 통해 문화 대혁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한편, 마오쩌둥의 역사적 지위를 보장하면서 마오 사상을 과학적으로 평가했다고 적고 있을 뿐이다. 마오쩌둥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두 지도자를 차별화해 덩샤오핑을 계승하려는 조심스런 중국 당국의 태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오늘날 덩샤오핑이 중국 인민 모두로부터 마오쩌둥을 능가하는 찬사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개혁·개방과 현대화 노선을 통해 중국 인민의 ‘먹고 입는 문제(溫飽 問題)’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이 ‘빈곤은 사회주의가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마오쩌둥 시절 강조되었던 이데올로기와 고립의 시대를 청산하고, 중국을 개혁·개방 시대로 이끌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그 결과 오늘날의 중국 경제는 도시와 농촌간, 해안과 내륙간 격차 등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 경제 규모로 세계 3위에 이르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개혁·개방에 나서기 전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백50 달러 이하였다.

중국인의 심성에 자리 잡은 덩샤오핑의 위대함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정치 역정과 이를 슬기롭게 극복한 불굴의 의지와도 관계 있다.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 기간 수차례 실각한 끝에 마침내 1978년 중국 중앙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부도옹(不倒翁)’, 오뚜기였다.

덩샤오핑은 수 차례 정치적 좌절을 경험했다. 1960년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있던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이 개시되자마자 마오쩌둥과 그의 부인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의 공격을 받고 당에서 축출되었다. 마오쩌둥은 1966년 8월 자신이 벌인 대약진 운동을 덩샤오핑이 실패했다고 비판하는 데 격분해 ‘자본주의 본부를 폭격하라’며 덩을 공격한 바 있다.

이후 덩샤오핑은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문화대혁명이 종결될 때까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축출과 복귀를 거듭했다. 1973년 국무원 부총리를 맡으며 복귀하는가 싶더니, 1976년 4월 4인방의 공격으로 다시 직무를 정지당했다. 중앙의 위험을 피해 광저우 군사령관 쉬스유(許世友)에게 몸을 맡겼던 그가 직위를 다시 회복한 때는 1977년 7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권력이 화궈펑의 수중에 있을 때였다. 최종적으로 그가 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11기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보통 ‘3중전회’로 부름)를 통해서였다. ‘마오쩌둥의 계승자’를 자처해 설득력을 잃었던 화궈펑은 1981년 완전히 축출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열린 ‘덩샤오핑 천하’는 그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1997년 2월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에 그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서 정치·경제·사회·외교·군사 분야 등 모든 영역에서 거대한 변혁을 일으켰다. 덩샤오핑은 당과 국가의 모든 역량을 개혁·개방과 현대화에 집중함으로써, 외교·안보 전략까지 모두 수정했다. 그가 권력을 잡은 뒤, 중국의 대미 관계는 소련의 공산 체제가 무너져 내리고 톈안먼 사태가 터진 1989년 이전까지는 황금기를 구가했다. 덩샤오핑은 이를 이용해 미국의 앞선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장차 중국의 현대화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대량 선발해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해귀파’로 부르는 이들은 귀국해 실제 개혁 ·개방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발전을 지속시키 위해서는 대결보다는 협력을 통한 정세 안정이 필요하다는 발상에서, 그는 주변국과 화해를 통한 안정을 도모했다. 1992년의 한·중 수교도 이 과정에서 양국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이루어졌다.

안보·국방 전략 역시 개혁·개방을 뒷받침하려는 의도에 따라, 과거 마오쩌둥 시절 채택했던 내륙 중시 전략을 연안 방어 전략으로 바꾸었다. 그는 또 한때 5백만 명에 육박했던 인민해방군에 개혁의 칼을 들이대 오늘날 인민해방군은 2백3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톈안먼 사태 무력 진압 지시해

목표를 향한 불굴의 의지와, ‘대’를 위해 ‘소’를 버리는 결단력은 그러나 덩샤오핑에게 많은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89년 중국을 들끓게 했던 민주화 열기를 군대를 동원해 강제 진압한 톈안먼 사태가 대표적이다. 당시 중국의 고관들이 사는 중난하이에 머무르고 있던 덩은 한밤에 당 간부를 모두 소집해 ‘강제 진압’을 지시했다. 그는 이때 자오쯔양 총서기를 학생 시위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로 축출했다.

중국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이루어지는 ‘탄신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중국의 현 최고지도부나 언론이 보이는 한결같은 공통점은, 이처럼 그가 남긴 오점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다. 지난 8월21일 후진타오 국가주석·원자바오 총리 등 중국 지도부는 ‘샤오핑 동지’가 생전에 쓰던 유물과 각종 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회를 열고 있는 국가박물관을 찾았다. 이보다 하루 전 후진타오·장쩌민을 비롯한 당 지도자들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대형 기념공연 <샤오핑니하오>를 관람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