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교육 “철자법부터 다시!”
  •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4.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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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 ‘교사 권위 회복’ 주창…‘권위주의 부활’ 논란 불러
과거로의 단순 회귀냐, 아니면 의도적인 보수화냐. 권위주의를 배척하고 자율·자유를 중시하는 프랑스에서 부쩍 권위주의를 예찬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권위주의’의 부활이 아닌 ‘권위’의 회복이다. 그 진원지는 다름아닌 프랑스 교육계이다.

최근 뤽 페리 후임으로 교육장관 자리에 앉은 프랑수아 피용이 새 교육개혁안의 구호로 ‘실추한 교사들의 권위 회복’을 내놓아, 권위가 화두로 떠올랐다. 장관 취임 초기, 그는 한 시골 학교를 찾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검은색 칠판, 회색 교복, 출석부 등 옛 소품들도 동원되었다. 뿐만 아니다. 수업에서도 옛날 방식을 적극 채택하라고 권고하고 나섰다. 받아쓰기, 외우기, 문법 교육을 강화하라는 것이었다.

언뜻 퇴행 현상으로 보이는 이같은 정책은 무엇보다 프랑스 사회가 직면한 위기감 때문에 나온 것이다. 프랑스 교육부가 내놓은 공식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 중학교 1학년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13%가 ‘쓸 줄도, 읽을 줄도, 셈할 줄도 모른다’. 최근 일부 교사들은 지난 수십년간 누적되어온 학력 하향 평준화의 심각성을 성토하다 못해 ‘글자를 구하자’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교내 폭력 문제도 교사들의 제재와 벌칙만으로는 근절하기 힘든 상태가 된 지 오래다. 교사들이 발간하는 한 잡지에 따르면, 15세 중학생의 27%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는다.

1950년대 프랑스의 한 기숙 학교를 무대로 한 영화 <코리스트>(합창단)의 흥행 성공은 현 교육 현실에 대한 프랑스인의 정서를 대변한다. 지난해 개봉되어 지금까지 관람객 8백만명을 돌파했으니, 프랑스 영화 치고는 전례 없는 기록이다.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자, 진보 진영의 비평가들은 ‘단순히 옛 시절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프랑스의 보수화 경향을 드러내는 위험한 신호’라고 경고했다.

<코리스트>는 한 교사가 무지한 어린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과정을 다룬, 훈훈한 인간미가 풍기는 음악 드라마다. 오늘날 기성인이 된 ‘68 세대’에게 1950년대의 기숙 학교란 훈육과 억압, 권위의 상징이었다. 체벌이 다반사였고, 어린이들의 인격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코리스트>는 그러나 이런 요소들을 슬쩍 스치고만 지나갈 뿐 문제 삼지 않는다.

<코리스트>의 성공 이후, 비슷한 소재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다룬 영화도 제작되고 있다. 11월 초에 개봉될 장-자크 질베르만의 <철자법 잘못>이 그것이다. 그는 자기가 실제 겪었던 ‘끔찍했던 추억’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영화를 촬영했다. “이 닫힌 세계에서 나는 아주 힘들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길들여졌다”라고 그는 회상한다.
영화·TV에서도 ‘옛날 학교 돌아보기’ 붐

‘권위 회복’에 대한 시비는 최근 <샤반 기숙학교>라는 ‘리얼 TV’가 인기를 끌면서 뜨거워졌다. 일부 교사들은 마침내 리얼 TV가 교육 문제까지 희화화하고 나섰다며 못마땅해 한다. 더욱이 미성년자들을 소재로 삼은 것을 두고 혀를 찬다. <샤반 기숙학교>는 이미 <로프트 스토리> <스타 아카데미> <나이스 피플> 등 히트작을 잇달아 낸 리얼 TV의 달인 엔디 몰의 최신작으로, 프랑스 상업 방송 중 하나인 ‘M6’의 공중파를 탔다. 이번에도 반향은 엄청났다. 선별 캐스팅된 ‘어린 얄개’ 24명은 지난 7월 한달간 규율이 엄격한 영국계 카톨릭 기숙 학교인 샤반 중학교에 입학했다.

한마디로 이 프로그램의 주안점은 학생들이 기숙 학교의 엄격한 규율에 얼마나 작 적응해 ‘착한 학생’이 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다. 교복을 입고 손에 잉크를 묻혀가며 받아쓰기를 하고, 침대를 ‘칼같이’ 정리해야 하며, 툭하면 시험을 치러야 하고,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암송해야 한다. 또 선배는 후배를 훈계한다.

1950년대 학생들의 모습을 재현한 이들의 생활상은 흑백 화면에 담겨 향수를 자극한다. 방송은 어린 학생들이 엄한 훈육에 얼마나 잘 길들여지느냐를 보기보다 얼마나 사고를 치고 반항하는가를 관찰하는 데 비중을 둔다. 참가자 24명 가운데 톡톡 튀고 잘생긴 아이들이 역시 인기몰이를 한다. 교육 현안에 대한 발전된 분석도, 깊은 조사도, 열띤 토론도 <샤반 기숙 학교>에는 없다. 그러나 기성 세대는 옛 추억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세대는 부모 세대의 학창 시절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흡족해 한다.

놀라운 것은 이전 기성 세대에 저항했던 오늘날의 대다수 기성 세대들이 ‘옛날 방식이 훨씬 더 나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맞춤법과 산수에 관해서라면, 옛 세대에 비해 요즘 아이들 실력이 훨씬 떨어진다. 프랑스에서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상당한 깊이의 작문 수업을 받는다. ‘68 혁명’ 이후 받아쓰기보다 작문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철학적 사고를 중시하기 때문에 객관식 시험은 없다. 모두 주관식, 아니 ‘글쓰기’이다.

문제는 교육이 너무 자유 방임형으로 흐르다 보니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다. 맞춤법 실력이 엉망인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교육부와 교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열혈 부모들은 자기네가 공부했던 어린 시절의 교재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교사들도 이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이에 맞추어 학습서 시장에 ‘클래식’ 바람도 불고 있다. 프랑스어 철자법 훈련을 위한 가장 확실한 처방은 ‘음절법’이다. 1907년 처음 출판되어 1950년대 그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보셰’ 방식은 단어를 음절 별로 분리해서 표기한다(예를 들어 ‘프랑스’ 대신 ‘프-랑-스’). 최근 이 보셰 방식이 그대로 복간되어 매년 8만 부가 팔리고 있다.

얼마 전에는 또 어린이 책의 주인공 ‘꼬마 니콜라’ 탄생 50주년 기념으로 6백 쪽이 넘는 <꼬마 니콜라> 종합본이 출판되었다. 르네 고시니(글)와 장-자크 상페(그림)가 만들어낸 개구쟁이 주인공 니콜라의 학교 생활만 보아도 프랑스 50년 교육사가 그대로 읽힌다.

교육부가 나서서 교사들의 권위를 회복시켜주겠다는 데 교사들이 반감을 가질 리는 없다. 문제는 덩달아서 권위주의가 부활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 교사들은 교육부의 권위 회복 캠페인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교사들은 지위에 수반되는 기득권으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지식을 전수하기 위한 수단 차원에서 최소한의 권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나쳤던 권위와 사라져 버린 권위 사이에서 프랑스 사회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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