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실 가스 전쟁’ 휴전은 끝났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4.10.1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실 가스 감축 논란 재점화…교토 의정서 발효되면 한국도 ‘발 등의 불’
전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는 ‘포성 없는 전쟁’에서 한국은 과연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러시아 정부가 최근 교토 의정서 비준을 재확인하면서, 온실 가스 감축 전쟁이 다시 한번 불붙을 조짐이다.

온실 가스를 감축하려는 노력이 새롭게 대두한 포성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은 영국 총리실 과학 담당 보좌관 데이비드 킹의 발언에서 새삼 확인된다. 그는 최근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2050년까지 영국의 온실 가스 배출량을 현재의 60%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고 강도 높게 제안하면서 ‘기후 변동이 앞으로 테러리즘 이상의 최대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가입하면 국제 규약으로 공식 발효

온실 가스 감축과 직결되어 있는 기후 변동이 환경기구 차원이 아닌 국제 안보기구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실도 의미 심장하다. 지난 8월 초 노르웨이 스피츠베르겐에서 열린 나토의 기후 관련 세미나도 그 중 한 예다. 참가자들은 ‘환경 문제는 곧 안보 문제이자 전략 문제’라는 데 인식을 함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나토 차원의 노력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교토 의정서에 불참을 선언해 국제 사회로부터 일방주의라는 비난을 들었던 미국도 기본 인식은 다르지 않다. 지난 9월24일 미국 시카고외교협회(CCFR)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후 변동은 국제 테러리즘, 생물화학무기, 비우호적인 국가의 핵 개발, 에이즈 등에 이어 미국인들이 ‘중대 위협’으로 간주하는 항목 8위에 올랐다. 응답자의 37%가 기후 변동을 중대 위협으로 여긴다고 답했다.
미국 정부나 의회의 공식 입장과 달리, 미국인 대다수는 기후 변동을 완화하려는 교토 의정서 가입을 지지하고 있다. ‘일반인’과 ‘사회 지도층 인사’로 나뉘어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일반인의 71%, 사회 지도층의 72%가 미국이 교토 의정서에 가입하는 것을 찬성했다.

기후 변동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효과적인 전략은 기후 변동의 핵심 원인 물질로 지목된 온실 가스, 그 중에서도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것이다. 이같은 전략은 1992년 유엔 차원의 기후 협약에서 채택되었으며, 1997년 통과된 교토 의정서에서 구체화했다.

하지만 그동안 전세계는 온실 가스 감축 방식, 특히 의무적인 감축 방식을 둘러싸고 분열을 거듭했다. 특히 이산화탄소 최대 배출국인 미국은 ‘온실 가스가 지구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와, 이같은 의무 감축이 자국 산업에 미칠 악영향 등을 내세워 온실 가스 배출량을 강제로 줄이려는 교토 의정서 가입에 반대해 왔다. 미국은 ‘의정서 상의 감축 할당량을 받아들일 경우, 전력 생산 단가가 40~50% 오르고, 주요 금속 생산비도 4~10% 상승한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같은 구실로 미국이 발을 뺐기 때문에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교토 의정서를 비준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교토 의정서는 55개국 이상이 비준해야 하고, 의정서를 비준한 나라들의 온실 가스 배출량이 선진국 그룹 전체 배출량의 55%를 넘어야 정식 발효될 수 있다. 지금까지 교토 의정서를 비준한 1백24개국의 총배출량은 선진국 그룹 전체의 47.5%에 불과했다. 전체 배출량의 17%를 차지하는 러시아가 의정서에 참여하면, 난항을 거듭했던 교토 의정서가 국제 규약으로 공식 발효된다.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면,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쪽은 한국이다. 유럽 각국과 일본은 이산화탄소의 주된 배출원인 화석 연료 의존도를 낮추고 재생 에너지를 적극 개발하는 등 이미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다. 유럽은 벌써부터 연도별 목표를 정해 기존 에너지원을 재생 가능 에너지로 바꾸어 왔다. 가령 전력 생산의 경우, 유럽은 1997년 전체 전력의 13.9%에 불과했던 재생 가능 에너지의 비중을 2010년 22%로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각종 입법 조처를 서두르고 있다.

미국은 겉으로는 ‘개발도상국의 의무 부담’을 요구하며 교토 의정서에서 빠진 상태이지만 뒷짐만 지고 있지는 않았다. 장차 있을 감축 전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2002년 ‘10년간 온실 가스 배출량을 18% 줄이겠다’는 독자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유리한 협상 전략을 세우는 데만 치중한 채, 정작 중요한 온실 가스 감축 노력은 게을리해 왔다. 강대국들 눈치만 살피고 감축 전쟁이 본격화했을 때를 대비한 ‘체질 개선’ 노력은 등한시했던 것이다.
현재 한국은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이면서도, 감축 의무는 면제받은 ‘비부속서 국가’이다. 기후 협약이나 그 연장인 교토 의정서 가입 논의 당시 개발도상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토 의정서가 공식 발효되면, 감축 의무라는 칼날이 바로 한국을 겨냥할 수 있다. 다음번 기후 협약 협상 일정에 ‘개도국 온실 가스 감축 부담 의무화’가 선진국 의무량 재설정 문제와 함께 제1 의제로 올라 있는 것이다.

한국은 도리어 이산화탄소 배출량 급증

온실 가스 배출 현황과 관련된 각종 통계 수치는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1990~2000년,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의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율은 13%에 그쳤다. 교토 의정서 이행 여부로 입씨름을 벌이면서도 만일을 대비해 나름으로 상당히 배출 억제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무려 82% 증가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체질 개선 노력을 등한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를 수 밖에 없다. 한국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현재 독일·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현재의 경제성장 추세나 온실 가스 감축 노력 수준으로 볼 때, 10년 뒤 한국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독일·일본을 크게 앞질러, 국제 사회로부터 집중적인 지탄과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의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세계 9위(2001년 현재 세계 전체 배출량의 1.8%)이다. 지난 7월 산업자원부·에너지관리공단 등이 주최한 기후 변화 협약 대응 세미나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 대비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몇몇 산유국을 빼놓고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2001년 기준·71쪽 도표 참조).

교토 의정서는 그간의 논의 과정에서 온실 가스 감축 노력을 촉진하고 의무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배출권 거래 제도’ 등 각종 유인 장치를 마련했다. 즉 한 국가나 지역이 당초 주어진 온실 가스 감축량을 초과 달성할 경우, 이를 온실 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국가나 지역에 팔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온실 가스를 줄이기 위한 선진국간 투자나 개발도상국에 대한 선진국의 투자도 일정 부분 온실 가스 감축 노력으로 인정해주도록 제도화했다. 한국에 온실 가스 감축 의무량이 주어질 경우, 한국은 배출권은 물론 각종 배출 저감 기술 면에서도 심각한 무역 역조에 직면할 수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기후 변동의 주된 원인이 산업 활동 등 인간의 행위라는 쿄토 의정서의 대전제에 과학자들은 완전히 합의하지 않았다. 아직도 일각에서는 기후 변동이 자연 순환 주기의 일부라는 설이 있지만, 대세는 점점 인간 행위의 영향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인 폴 크루츤(막스플랑크 연구소)과 같은 대기화학자는 이미 4년 전 기후 변동에 대한 인간 행위의 지대한 영향을 기준으로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기를 ‘현생대’로부터 ‘인류대 시대(anthropocene age)’라고 새롭게 정의했을 정도다.

지난 8월 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로사이언스 포럼에서도 폴 크루츤의 주장이 재확인되었다. 피할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온실 가스 감축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환경론자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