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조처는 치밀한 경제 정책”
  • 남문희 전문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2004.1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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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 산하 조선문제연구소에서 북한 경제 연구한 문호일씨 인터뷰
2002년 7월1일은 북한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날이다. 북한 스스로 ‘제2의 건국’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처럼, 이 날을 기해 북한은 계획경제의 두툼한 옷을 벗고 시장 경제화의 길에 과감하게 올라섰다. 임금과 물가 현실화로 대표되는 북한의 ‘경제관리 개선조처’는 종합 시장 등장 등 유통망 정비와 기업 구조 조정 등으로 이어지면서 갈수록 그 심도를 더해 가고 있다.

그러나 7·1 조처 전야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북한의 정책 당국자들은 왜 하필이면 2002년 7월1일을 디데이로 잡았는지 등 궁금증은 여전했다. 1989년부터 조총련 산하 조선문제연구소에서 북한 경제를 연구해온 문호일씨(37·히토쓰바시 대학 경제연구소 COE 연구원)는 이같은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지난 7월 일본 아시아경제연구소가 발행하는 학술지에 실린 그의 논문 <현지 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개혁>은 바로 이 ‘7·1의 전야’를 학술적으로 추적한 글이었다. 문호일씨에게 국제 전화를 걸어 북한 경제의 궁금한 점을 물었다.

7월에 발표한 논문 제목에 ‘현지 보고’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띈다.

2002년 7·1 조처가 발표된 후 4개월쯤 지난 11월 하순에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와 김일성고급당학교의 경제 전문가들로부터 이 조처의 정책적 의도와 배경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들었는데, 그 내용과 현지에서 입수한 문헌 자료 등을 토대로 논문을 작성했다는 뜻이다.

7·1 조처에 대해 남쪽에서는 그동안 북한 경제가 위기 상황에 빠져 어쩔 수 없이 취한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로 본다. 7·1 조처가 취해지기 두 해 전인 2000년부터 우리 나라(그는 북한을 우리 나라라고 불렀다) 경제는 위기에서 벗어나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이런 흐름을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정책 당국자들이 치밀한 고려 속에 능동적으로 취한 조처라고 본다.

당시 경제가 회복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입증되나?

매년 3월 국가재정 통계가 발표되는데 이것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경제가 안 좋았던 1995년의 경우 그 해의 예상 수입이 그 전 해에 비해 마이너스 41.6%까지 떨어졌다. 이후 조금씩 호전되다가 1998년부터 플러스로 돌아섰다. 1999년까지는 0.1% 증가라는 미미한 수준이었던 데 반해 2000년 들어서면서 갑자기 3.5%로 늘었다. 경제 회복이 지표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가 뭔가?

국가 재정 수입의 대부분은 국영기업으로부터 나온다. 즉 국영기업의 가동률이 높아지고 채산성이 좋아졌다는 얘기다. 그 이유는 그 전 해인 1999년부터 시작된 연합기업소 구조 조정이 성과를 보기 시작한 덕분이다. 기존 연합기업소에는 서로 다른 부문의 기업들이 한데 모여 있었는데 이것을 전부 해체해 같은 부문끼리 통폐합하는 조처가 2000년까지 취해졌다. 전문화와 슬림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한정된 자금으로도 공장 가동이 가능해졌고 채산성도 높아진 것이다.

정책 차원에서는 어떤 움직임이 있었나?

이미 1998년부터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1998년 9월17일 <로동신문>과 <근로자>에 공동으로 게재된,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 로선을 최후까지 관철하자’라는 논설에서 ‘실리’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경제 사업에서 실리가 살아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 매년 신년 공동 사설에서 이 말이 빠짐없이 등장했는데, 2000년까지는 그 대상이 약간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다. 그러다 2001년 들어서면서 실리에 입각해 ‘경제 관리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흐름이 그대로 2002년의 7·1 조처로 이어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를 일종의 준비기라고 한다면 2001년 이후를 본격 추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역성 김용술 부상도 가격 조절 정책을 위해 2년간 준비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7·1 조처는 어느 시점에 돌발적으로 추진된 게 아니라 오랜 기간 정책 당국자들에 의해 준비돼 온 것이고, 단지 타이밍을 2002년 7월1일에 맞춘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리 또는 실리주의라는 말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나?

1998년 9월17일의 공동 사설이 나오기 두 주 전,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회 회의가 열렸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됐다. 당시의 최고인민회의 소집과 새로운 내각 구성은 김정일 위원장이 3년상을 마치고 업무에 복귀한 뒤 첫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그 두 주 후에 경제 정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이 실리라는 말 속에는 신내각의 경제정책 방향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실물경제 회복과 2001년부터 실리에 입각해 경제 관리 개선이 본격 추진되기 시작한 것 사이에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나?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경제가 회복세에 접어든다는 것은 곧 각 공장 기업소에서 생산되는 상품이 늘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래 형성된 국영 유통망과 농민시장 등 비국영 유통망 사이의 가격 차이가 그대로 유지되면, 경제 회복 덕분에 비국영 유통망, 즉 제2 경제만 활성화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노동자나 농민 처지에서는 값을 싸게 쳐주는 국영 유통망 대신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농민 시장을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국영과 비국영 유통망 사이의 가격 차이를 없앨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임금을 올려 구매력을 보전해주는 조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경제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기업 자율성을 높이고, 계획경제 부문을 일부 전략산업 분야에 국한하는 한편, 수매가를 높여 농민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조처들이 동시에 취해지게 된 것이다.

7월1일을 택한 이유는 뭔가?

아무런 대책 없이 임금과 물가를 한꺼번에 올리면 통화 증발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우려가 상당히 있다. 당시에는 식량을 미리 확보해 적당한 가격에 국영 상점에 공급함으로써 가격 안정화를 유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농사를 이모작으로 짓고, 6월 말이면 전작으로 지은 밀·보리·대두 수확이 끝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전작 작물을 확보하기 위해 7월1일이라는 날짜가 나온 것이다. 내각에서는 이보다 두 달 정도 전인 5월11일, 미리 농민들에게 7·1 조처의 내용과 함께 정부 수매가를 획기적으로 올릴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해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정부 수매에 응하도록 조처했다. 이런 치밀한 고려 속에서 7월1일이라는 디데이가 정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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