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의 ‘구세주’ 기독교 우파
  • 워싱턴·정문호 통신원 ()
  • 승인 200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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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신념·애국심 같은 도덕적 가치 중시…부시에게 맹목적 충성 바쳐
대선 이전에도 진보적 성향의 민주당파와 보수적인 공화당파로 갈기갈기 찢긴 미국 사회의 분열이 11월2일 대선 이후 더욱 깊어지고 있다. 더군다나 재선에 성공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주요 각료 직에 초당적인 인사보다는 자신의 심복 내지는 기독교 우파 인사들을 대거 임명할 방침이어서 이같은 분열상은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정치 분석가들은 부시가 재선에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기독교 우파 유권자들을 기쁘게 하는 한편, 공화당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해 외교 분야는 물론 법조계를 포함한 사회 각 분야의 총책을 우파 인사로 물갈이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두고 뉴욕 타임스의 우파 칼럼니스트인 윌리엄 사파이어는 “부시는 집권 2기 인사를 통해 앞으로 의사 결정의 중심을 오른쪽으로 옮겨갈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요즘 미국 사회에서는 이번 대선에서 부시를 재선시킨 주역이자 맹목적 충성을 바친 기독교 우파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주요 언론에서는 후보의 능력과 비전보다는 도덕적 가치와 자질을 더 중시한 이들을 가리켜 ‘가치 지향적 유권자들(values voters)’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었다.

한국인들에게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신조어는 미국 대선이 끝난 이후 워싱턴 정가에 회자되는 최대 화두다. 대선 당일까지도 이라크 문제와 경제난으로 인해 고전할 것으로 예상되던 부시에게 표를 몰아주어 재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뉴욕 타임스의 고정 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대선 직후 자신의 칼럼에서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은 이슈를 팔아 낭패를 보았지만, 공화당은 가치를 팔아 성공했다’면서, 공화당의 가치를 하느님(God) 총기(Guns) 게이(Gay) 그리즐리(Grizzlies) ‘4G’로 압축해 설명했다.

부시측이 미국민 3분의 1이 기독교 신자인 점을 의식해 종교적 신념을 강조하고, 총기 규제와 동성애자(게이)의 결혼에 절대 반대하며, 나아가 북미산 회색곰 그리즐리로 상징되는 환경주의 등 보수적 가치들을 적극 옹호해 대히트했다는 것이다. 다소 고루하고 보수적이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들인 가치 지향적 유권자들은 지역적으로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동부와 서부의 연안 지역, 그리고 오대호 주변을 제외한 내륙 지역에 고루 분포해 있다. 주로 농업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의 주거 지역을 흔히 ‘시골 미국(rural America)’으로 부르기도 하고, 중서부와 남·북부를 아우르는 한복판을 차지한다고 해서 ‘중앙부(heartland)’라고도 한다.
내륙에 고루 분포, 주로 농업에 종사

이들은 미국 전체 유권자의 23%에 불과하지만, 50개 주 가운데 31개 주에 걸쳐 분포되어 있을 만큼 주거 지역이 광활하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해온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 결집해 존 케리 후보에 맞선 부시 후보에게 많은 표를 몰아주었다.

정상적인 유권자라면 당연히 해당 후보의 능력과 비전에 관심을 가질 법도 하지만 기독교 보수층 유권자들은 종교적 열정·하느님·신념·애국심·가족·공동체·도덕성·청렴성 같은 일상적인 가치뿐 아니라, 낙태 반대와 총기 소유 규제 반대, 동성 결혼 반대, 감세 등 기존의 보수적 가치에 대한 후보의 정견을 더 중시한다. 후보의 자질이 아무리 출중해도, 국가 미래에 대한 비전에서 이런 가치들을 공유하지 않는 한 이들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들은 이런 가치를 경시하는 후보를 오히려 ‘비미국적’이라고까지 매도한다.

‘아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저런 후진적이고 무식한 유권자들이, 그것도 미국에 있을까’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들의 실체와 파워는 이번 미국 대선을 통해 또다시 분명히 확인되었다.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자. 이번 대선에서 막판까지 최대 격전지로 떠올랐던 동북부 오하이오 주. 부시 집권 1기 동안 일자리 수십만 개가 사라져 주민들 원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그러나 개표 결과, 부시는 케리에 비해 15만여 표를 더 얻어 승리했다. 대선 직후 주요 언론이 그 원인을 분석했는데, 결론은 간단했다. 오하이오 주 역시 ‘가치 지향적 유권자’ 천지였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하이오 주 시골에 사는 낸시 월레스라는 한 주부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부시 후보에게 끌리게 된 가장 첫 번째 인상은 그의 도덕성과 인격이었다’고 밝혔다.

교육·생활 수준 떨어지고 노년층 많아

이번 대선의 뜨거운 쟁점이었던 이라크 전쟁 문제만 해도 동부 유권자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 미군을 내몰았다’며 아우성을 쳤지만, 중앙부 유권자들의 반응은 판이했다. 미시간 주 주민인 샌디 해들리는 “나도 해병대에 자식을 보낸 엄마여서 미군이 이라크에서 전사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테러를 막기 위해 부시 대통령이 미군을 보낸 것은 잘한 일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일도 있다. 대선이 있기 몇 달 전 부시가 격전지였던 중서부 아이오와 주의 두브크라는 소읍에서 유세할 때였다. 당시 국민의 관심은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과 관련해 의회 증언대에 선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일거수 일투족에 쏠려 있었다. 그러나 변두리 아이오와 주는 달랐다. 지역 신문들은 1면에 부시의 유세를 대서특필했다.

이 날 두브크 최대 지방지인 텔레그라프 헤럴드의 1면 한쪽에는 ‘대통령 유세지에 음식 반입 금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지만, 럼스펠드 관련 뉴스는 단신으로 처리되었다. 지역 텔레비전인 KCRG의 뉴스 담당 책임자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이 이런 외진 곳까지 방문하는 일이 평생 몇 번이나 있겠느냐’며 부시 특집 방송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지방과 중앙의 현격한 격차를 보여준 이같은 현상은 부시가 유세차 방문한 중앙부 다른 지역에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중부 미주리 주를 방문한 부시는 “가족과 신앙의 가치, 개인적 책임과 근면의 가치를 중시하는 이곳 중앙부에 다시 오게 된 것이 너무도 기쁘다”라는 말로 연설 첫마디를 시작해 유권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선거가 끝난 뒤 오하이오 주 아르콘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인 릭 파머 박사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이 중앙부 유권자들과 문화적·도덕적 가치에 기반을 둔 정서적 공감대를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이 그의 가장 큰 무기였다’라고 평가했다. 또 중서부 네브래스카 주의 공화당 출신 주지사인 마이크 조안스도 “적어도 가치란 중앙부에서는 비경쟁적인 품목이다. 이번 대선에서 가치를 도외시한 케리의 엘리트주의적인 동부 접근 방식이 중서부와 서부에서 전멸을 가져왔다”라고 지적했다.

같은 미국 땅에 살면서도 좀더 교육받고 풍족한 동·서부 지역 주민들과는 ‘딴 세상’에 사는 중앙부 유권자들의 또 다른 특징은 노년층이 많다는 점이다. 기성 세대의 고루한 생활 방식과 가치관에 염증을 느낀 중앙부 젊은이들이 인근 대도시나 동서부로 이주하는 경향이 심해지면서 이 지역의 노령화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이들 노년층 대부분은 ‘방탕하지 않으며, 남에게 빚지지 않고 형편껏 살며, 근검 절약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건전한 가치를 생활 신조로 삼고 사는 보수층이다. 이들의 후진성은 종종 지리적인 요인과도 깊숙이 연계되어 있다. 실제로 지금도 중앙부 일부 주의 경우 차로 한 시간씩 달려야 겨우 약방을 찾을 수 있는 외딴 마을이 허다하다. 어떤 곳은 사람보다 젖소가 더 많을 정도로 인구 밀도가 낮다. 중앙부 주에는 군 부대도 많은데, 이곳에 근무하는 주방위군 대원들도 거의가 지방 출신이다. 그러다 보니 주방위군 대원이 혹시라도 이라크로 파견되면 해당 대원의 출신 마을에서는 1년 내내 그의 동정이 큰 뉴스거리가 된다.

중앙부 유권자들의 특성은 또 있다. 동·서부 주민들보다 교육 수준이나 생활 수준이 아무래도 ‘한 수 아래’이다 보니, 이들은 연방 정부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들의 세계관도 생업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를테면 허리케인의 상습 피해 지역인 플로리다 주의 경우 해마다 주민의 최대 관심사는 연방 정부의 재난보조금 규모이다. 사냥터가 많은 중서부의 여러 주에서는 총기 소유 규제 문제가 주민들의 가장 큰 현안이다.

또 밀이나 옥수수, 사탕수수를 많이 재배하는 남부 주의 경우 당장 농업보조금을 누가 더 많이 주느냐에 따라 정치 지도자를 판단한다. 자신들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미국과 중남미 국가 간에 체결된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 만큼은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선거가 있는 해의 농산물 가격이나 농업보조금 문제가 어떻게 결판 나느냐에 따라 이들의 ‘표심’도 결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오리건 주가 중앙부의 다른 주들과는 반대로 부시를 외면한 것은 주내 농업 황폐화와 관련이 없지 않다. 50개 주 가운데 소득 순위가 꼴찌에서 네 번째인 오리건 주는 실업률이 전국 평균의 2배를 웃도는 12%에 달하며, 일부 군에서는 부녀자들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고, 연방 정부가 빈곤층에 지급하는 식권에 의존하는 가정도 적지 않다. 세계 정세에 관심 있는 동부 식자층 유권자들에게나 관심을 끌 법한 이라크 전쟁이나 재정 적자를 떠들어 보았자 중부 유권자들에게는 ‘쇠귀에 경 읽기’다.

“다음 대선도 도덕 가치 중시하는 후보 당선”

이처럼 미국 정치·사회의 중심인 동부와 동떨어져 자기들만의 삶과 가치관만 고집하는 중앙부 ‘가치 지향적 유권자들’의 보수적 성향이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사상 유례 없는 9·11 테러를 겪은 이후 조성되어온 안보 불안 상황에 대해 동·서부 주민들이 다소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것과 달리, 중앙부 주민들은 오히려 애국심을 호소하며 더욱 결집하고 있는 형국이다.

게다가 동부 매사추세츠 주에서 시작된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동성 결혼 합법화 조처는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번 대선과 동시에 치러진 각 주의 주민투표에서 11개 주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올렸지만, 모조리 거부된 것도 기독교 보수층이 결집한 한 단면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요즘 들어 민주당 성향의 진보적인 기독교 인사들은 민주당이 차기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도덕 가치를 중시하는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이번 대선을 통해 부시와 공화당 편으로 눌러앉은 ‘중앙부’ 유권자들이 이들의 목소리에 과연 얼마나 귀 기울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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