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유럽연합에 왜 목 매나
  • 이스탄불·한상진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4.1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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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난 해소 기대, 가입 협상 본격화…이웃 아랍국들은 못마땅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장갑차를 타고 시내 곳곳을 순찰하는 곳, 도시를 끼고 있는 산꼭대기에는 어김없이 군 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곳. 행인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면 어김없이 공화국 설립자인 무스타파 케말의 초상화와 동상이 자리 잡고 있는 곳. 터키를 처음 찾는 외국 여행자들이 느끼는 감상이다. 한마디로 터키는 아직도 권위주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경찰 국가이다. 이런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려고 그토록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2월17일, 내년 10월부터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을 위한 협상을 시작한다는 공식 발표가 나오기 이전부터, 터키는 유럽연합 회원국처럼 행동했다. 상점들은 물건값을 표시한 딱지를 터키 리라화에서 유로화로 바꾸어 달았고, 지방 도시들도 멀쩡한 도로를 파헤치고 재포장 공사를 했으며, 오래된 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현대식 고층 빌딩을 세우고 있다.

터키에는 지금 거대한 개혁 바람이 불고 있다. 화폐 개혁도 단행했다. 100만 리라(YL)가 오늘날 1리라(YTL)가 되었다. 한때 터키 리라 값은 형편없이 떨어져 1달러에 150만 리라까지 떨어진 적이 있다. 터키 언론은 연일 자국이 유럽연합에 가입했을 때 얻게 될 이익을 ‘선전’하면서, 터키 국민들에게 장밋빛 환상을 심어주기에 바쁘다.

물론 터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반대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주된 논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집합체에 한데 섞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연합 가입 반대론에는 대안이 없다. 터키 정부가 내세우는 온갖 현실적 이득을 상쇄할 만한 명분이 없다.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데 있다. 잘 나가던 터키 경제가 휘청거린 것은 1990년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난 뒤, 터키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해 본격 시동을 걸었다. 터키 경제를 유럽연합 경제와 연동함으로써 다시는 그같은 경제적 곤란을 겪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터키의 ‘탈아(탈아랍) 입구(유럽으로 들어감)’ 전통은 이보다 훨씬 더 뿌리가 깊다.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붕괴된 뒤 건국된 터키 공화국은 출범하면서부터 유럽화를 추진했다. 먼저 아랍어 문자를 로마자로 바꾸었으며, 일상 생활에 쓰는 많은 용어를 서양 언어에서 차용했다. 당시 무슬림 인구가 전체의 90%에 육박했는데도, 이슬람을 국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공휴일도 이슬람 전통의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꾸었다.
‘탈아입구’의 오랜 전통

그 뒤 일종의 ‘세뇌’가 이어졌다. 국민들을 끊임없이 ‘계몽’해 터키 국민 대부분이 스스로를 아랍보다 유럽에 더 가까운 민족으로 여기도록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럽 국가와 아랍 국가 모두를 다녀본 필자의 눈에, 터키인들은 아직도 문화적 전통이나 생활 습관 면에서 유럽보다 아랍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현재의 터키인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할까. 반응은 갈린다.

“나는 아랍에는 관심 없다. 유럽에 몇 차례 여행한 적이 있지만 터키 동쪽(즉 아랍 세계)으로는 가고 싶은 생각도, 관심도 없다.” 이스탄불에서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는 한 터키인이 필자에게 던진 말이다. “하지만 당신 가게에서 팔고 있는 물건은 아랍의 전통 문화 상품 아니냐”고 반문하자. 그는 언성을 높이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아랍? 나는 아랍을 모른다. 이것들은 터키의 전통 문화 상품이다.”

터키는 유럽을 지향하면서 아랍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터키와 국경을 접한 주변 아랍국의 적대감도 상당하다. 갈등이 누적되어 아랍인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적대감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듯했다. 터키인들은 지난해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다. 하지만 이라크에서 꽤 많은 터키인이 살해되었다. 이 배경에는 터키에 대한 아랍인의 적개심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보다는 유럽을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스탄불에서 만난 한 터키 대학생의 말이다. ‘제국주의 연합’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는 반면, 제국주의 부활을 바라는 젊은이들도 있는 것이다.

유럽 상황과는 너무나 다른 권위주의 정권과 어려운 경제 상황을 자조하는 이들도 있다. “터키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아마 100년쯤 지나면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호텔에서 일한다는, 터키 중부의 한 도시에서 만난 젊은이의 반응이다.

유럽연합 가입 찬성파의 주요 관심사는 일자리·생계·취업 등이다. 유럽연합에 가입하게 되면, 비자를 받기 편하고 이주도 비교적 자유로워져 유럽에서 취업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 심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가장 반기는 쪽은 터키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는 쿠르드인들이다. 쿠르드족은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하면서 공식적으로 인권 상황이 개선된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터키인들 사이의 다양한 입장 차는 그렇다고 치고, 과연 오는 10월부터 시작될 협상에서 유럽연합 가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터키와 유럽연합의 협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키프로스(사이프러스) 귀속 문제는 일단 가닥을 잡았다. 그렇다면 다음은 터키의 경제다. 터키인들은 억지로 경기를 부양시켜 일단 유럽연합에 가입한 뒤, 유럽연합의 도움을 받으면 경제난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눈치다. ‘가입 협상에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 외에 특별한 이유 없이, 지난 몇 개월 사이 터키 물가가 10% 이상 뛰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유럽과 터키 간의 문화 장벽을 극복하는 것도 난제이지만, 이 역시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이 유럽의 문화적 다양성 확대에 기여한다고 보면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 외에 터키인들이 유럽으로 몰려들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이 또한 일시적으로 여행 제한 등의 특별 조처를 취해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쿠르드인 처우 문제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현재 이 문제는 터키 정부의 꾸준한 노력으로 국제 사회에서 별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다만 프랑스·독일 등 ‘터키 끌어안기’에 부정적인 국가들이 시간 끌기 차원에서 쿠르드족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터키 정부는 쿠르드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민감한 반응을 보여 왔다. 독립 국가가 탄생하면 내정 간섭이라는 비난을 살 수 있는데도 이라크 내 쿠르드인의 독립 움직임까지 견제할 정도이다. 현재 터키에는 줄잡아 2천만 명 이상의 쿠르드인이 살고 있으며, 터키 정부는 이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펴왔다.

쿠르드족 문제도 민감한 사안

12월17일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 협상에 대한 발표가 있은 직후, 레젭 타입 에르도간 터키 총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쿠르드인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에르도간 총리는 “터키에는 터키인만 있을 뿐이다. 터키인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답하면서 빠져나갔다.

쿠르드 독립을 외치다가 추방당했던 인사들의 귀국이 최근 20년 만에 허용되고, 정치적인 박해도 공식적으로는 없어졌지만, 터키 정부의 쿠르드인 통제는 훨씬 지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쿠르드인들의 독립 욕망을 더 부추길 수 있다. 필자가 만난 많은 쿠르드인들은 터키 정부가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자치권을 허용한다면 굳이 독립할 필요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50년 이상 중근동에 퍼져 살며 동질성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이들이 하나로 뭉쳐 독립 국가를 이루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에르도간 터키 총리는 벨기에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평화와 인권에 대한 터키의 기여를 강조하면서 장밋빛 공약을 남발했다. 그의 약속대로 터키가 유럽연합 정식 회원국이 되는 날, 쿠르드인도 진정한 터키인으로 인정받게 될 지 국제 사회는 끝까지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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