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앞에 강철 펜도 운다
  • 스트라스부르·류재화 통신원 ()
  • 승인 2005.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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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문의 자존심 르 몽드·리베라시옹, 무기상과 재벌에 팔려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됐나.”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 몽드가 심각한 경영 위기를 맞고 있다. 르 몽드는 대폭적인 구조 조정과 함께 살림 규모를 축소하려고 얼마 전 사옥까지 이전했다. 지난해 12월 말 이 신문은 창간 60돌을 맞았지만 회갑 잔칫상은커녕 낯선 신사옥에서 자조와 울분을 토해야 했다.

르 몽드 신화는 이대로 무너지는가. 프랑스 여론은 ‘이미 신상(神像) 받침대가 부서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92명이 자진해서 신문사를 떠났다. 전체 기자 3백34명 가운데 35명도 보따리를 쌌다. 가장 큰 충격파는 편집국장 에디 플레넬의 사임이다. 이로써 지난 10여 년간 ‘환상의 콤비’로 불리며 르 몽드를 프랑스 최대 일간지로 키운 사장 장-마리 콜롱바니와 최고사령관 에디 플레넬 쌍두체제도 종말을 고했다.

르 몽드의 재정난은 몇년 전부터 공공연하게 알려졌다. 광고 시장 악화 및 판매 부수 격감으로 인해 최근 몇년간 매년 마이너스 성장을 하다가, 현재 부채만 1억8천 유로(약 2천5백억원)를 떠안게 되었다. 이 가운데 약 5천만 유로가 최근 3년간 불어난 것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다행히 자국에서 ‘구세주’를 찾았다. 몇년 전 ‘아세트’(종합 미디어 회사)를 인수한 무기상 아르노 라가르데르이다. 라가르데르 그룹의 계열사인 ‘아셰트 악티브’는 르 몽드에 수혈이 급한 5천만 유로를 투자하게 된다. 이 액수는 르 몽드 기업(르 몽드 및 자회사) 전체 주식 소유분의 15%에 해당한다. 아셰트는 20년간 르 몽드 신문의 인쇄를 맡아온 협력 업체이자 주요 외부 투자자다.
다른 매체들도 경영난에 ‘쩔쩔’

편집국장 에디 플레넬은 사장 및 경영 지도부의 이같은 자본 유치에 굴욕감을 느끼고 사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도대체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 우리를 무기 상인에게 팔아넘길 작정인가. 우리 신문을 ‘할배들’이나 보는 신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 판인가”라며 울분을 토한 것으로 전해진다.

“펜으로 살을 후벼라!” 편집국장 에디 플레넬은 기존의 ‘얌전한’ 르 몽드에 ‘탐사 저널리즘’을 접목한 인물이다. 탐정 수사를 방불케 하는 취재력, 사건을 요리할 줄 아는 탁월한 감각, 장문의 심층 분석 기사 등 르 몽드 식 저널리즘을 만들어낸 것도 그다.

그러나 모든 것을 그가 결정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기사의 제목은 모두 그의 손에서 요리되었다. ‘에디의 다다(dada)’란 그가 단 제목의 글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나친 장광설, 독단, 야망, 들끓는 에너지. 동료들은 질투했고 내부 갈등은 첨예화했다.

그의 후임을 맡은 제라르 쿠르투아는 과묵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콜롱바니 사장은 최근 여러 인터뷰 자리에서 “르 몽드는 앞으로 사건 폭로보다는 ‘합법적 유효성(발리다시옹)’을 더 중시하겠다”라고 말했다. 플레넬이 가장 싫어하는 낱말이 바로 ‘발리다시옹’이다.

휘청거리는 신문은 르 몽드만이 아니다. 종이 신문의 위기는 세계적 추세이지만, 프랑스 신문의 현주소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스포츠지 <에퀴프>, 경제지 <에코>, 그리고 몇몇 지방지를 제외하곤 대부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무가지의 공격 경영과 인터넷의 시장 잠식 탓이다. 무가지 중 선두를 달리는 <20분>은 하루 평균 2백만 부가 소비된다. 또 <파리지앵>은 1백70만 부, <메트로>는 1백60만 부에 이른다.

독자 노령화도 문제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신문을 읽지 않는다. 프랑스인 5명 중 1명만이 일간지를 읽는다. 지난해 초반에만 인터넷 사이트가 4백70만 개나 생겼다. 개인의 내밀한 글뿐만 아니라 웬만한 뉴스는 다 챙겨볼 수 있는 ‘블로그’도 최근 종이 신문의 위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제작지 상승, 높은 과세, 막강 파워를 자랑하는 노조, 비효율적 배달 및 유통 체제 등은 프랑스 신문을 유럽에서 가장 비싼 신문으로 만들어 놓았다. 영국 일간지가 평균 0.39 유로인 데 비해, 르 몽드·리베라시옹은 1.2 유로(약 1천6백원)이다.
피가로 새 주인도 무기상

신문도 이제 돈 버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그런데 하필 몇 달 사이 ‘독립 저널리즘’의 깃발 아래 꿋꿋하게 버텨온 프랑스 대표 신문사 3사가 잇달아 무기상 또는 귀족 재벌에게 ‘구걸’하거나 팔리는 신세가 되었다. 규모는 르 몽드의 절반 정도이지만 영향력은 버금가는 리베라시옹도 최근 2천만 유로를 구걸해야 했다. 프랑스의 악명 높은 미디어 재벌 장-마리 메시에에게 넘어간다는 소문까지 떠돌았으나, 최종 구원자는 영국계 대재벌 로스차일드로 결정되었다. ‘68 혁명 세대’ ‘마오쩌둥주의자’로 유명한 사장 세르주 쥘리는 최근 로스차일드 가문의 사촌인 경마업자 에두아르 로스차일드 경을 프랑스 파리 시내의 한 식당에서 ‘알현’하고 원조를 청했다. 로스차일드는 리베라시옹의 주식 37%를 소유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일간지 피가로를 비롯해 <엑스프레스> <마담 피가로> 등 10여 개 일간지 및 잡지사를 소유하고 있는 속프레스 그룹도 지난해 6월 항공기-무기 제조상 세르주 다소에게 팔렸다. 피가로는 지난해 9월 새 사장이 취임했고, 직원들도 전격 물갈이되었다. 속프레스 그룹에 속한 전체 기자 2천7백여명 중 2백70명이 이미 사표를 썼다. 피가로의 새 주인이 된 다소는 최근 편집국 기자들 앞에서 ‘건전한 사고’를 강조했다고 한다. “가끔 협상 중인 계약안을 미리 발설하는 기사들이 있다. 이는 선보다 악을 양산하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우리 나라의 상업적·기업적 이익에 결정적인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라고도 말했다. 여기서 그가 강조한 ‘우리 나라’는 ‘군수 산업’을 뜻한다. 피가로 기자들의 앞날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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