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풍’ 타고 세대 교체 ‘개그 대권’ 누가 쥘까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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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 청산’ 패러디로 정치 코미디 부활 신호탄
"개그 대권’을 놓고 벌이는 KBS와 SBS의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다. <개그 콘서트>로 굳히기에 들어간 KBS가 2중대 격인 <폭소 클럽>까지 내세워 치고 나가는 가운데 SBS가 오는 4월20일 처음 방송하는 <웃찾사>(웃음을 찾는 사람들)로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웃찾사>에는 심현섭·강성범·황승환·김대의·이태식·박성호·김준호·이병진·김 숙 등 지난 1월 초 집단으로 출연을 중단한 <개그 콘서트>의 ‘구주류’ 멤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이 친정 격인 KBS와 어떤 승부를 펼칠지 주목된다 이와 함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개그 제3의 길’을 가고 있는 MBC의 실험이다. MBC는 <코미디 하우스>에서 ‘3자 토론’ 등 본격적인 정치 풍자 코미디를 선보이며 성공적으로 틈새 개그 시장을 파고들었다. 정치판을 개그판으로 비유한 ‘3자 토론’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벌어졌던 대선 후보들의 텔레비전 토론을 패러디한 프로그램으로 최근 떠오르고 있다.

정치 풍자 코미디 부활과 관련해서 특히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 개그맨 배칠수의 ‘개그 행보’이다. ‘3자 토론’에서 노무현 후보 역을 맡고 있는 그는 맥이 끊겼던 정치 풍자 코미디를 부활시켰다. 그가 인터넷 방송 진행자에서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과정은 바로 정치 풍자 코미디의 성장 과정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노무현 대통령을 패러디하고 있는 그의 ‘개그 행보’가 노대통령의 정치 행보와 무척 닮았다는 사실이다.

우선 두 사람 다 네티즌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인과 개그맨으로 입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노대통령이 인터넷 팬클럽인 ‘노사모’와 <오마이뉴스> 같은 인터넷 언론을 통해 컸듯이 배씨도 대안 언론 격인 인터넷 방송에서 DJ를 하며 이름을 알렸다. 386세대를 지지 기반으로 한다는 점도 닮았다. 정치 풍자의 경우 맥락을 모르면 웃을 수 없는 특성이 있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른 386세대는 배씨의 정치 풍자에 뜨겁게 반응하는 세대이다. 이들은 배씨를 든든히 지지하는 세력인 배사모(‘배칠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활동도 벌이고 있다.

‘소신파’라는 점도 똑같다. 선거 때마다 지역 감정 벽을 넘기 위해 부산에 출마했던 노대통령처럼 배씨도 인터넷 방송에서 라디오로, 다시 텔레비전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동안 정치 풍자라는 외길을 걸었다. 노대통령이 원외에서 야인 생활을 하며 소신파 정치인으로 이미지를 굳혔듯이 배씨도 인터넷의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통해 정치 풍자 노하우를 쌓았다.

사실 정치 풍자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좋은 소재가 되지 못한다. 개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은 정치를 모르고, 정치를 아는 사람은 개그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 감정을 깨기 위해 무모한 도전을 계속했던 노대통령처럼 배씨는 말장난 일색인 개그판에서 고군분투하며 정치 풍자를 발전시켰다.

다른 개그맨들이 단순한 음성 모사에 머무를 때 그는 정치인 캐릭터까지 모사했다. ‘3김 퀴즈’를 할 때 그는 ‘막무가내로 때려 맞추는 YS’ ‘아는 척만 하고 끝이 안 좋은 DJ’ ‘적당주의에 빠져 중간만 가자는 JP’로 캐릭터를 설정했다. ‘3자 토론’에서 평검사와의 대화, 이라크 전쟁 파병 등 정치적 사안까지 패러디할 만큼 그의 풍자는 꾸준히 진화했다.

배씨는 개그를 통한 ‘3김 청산’도 시도했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3김 퀴즈’를 진행하던 그는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과감히 세대 교체에 나섰다. 패러디 대상을 이회창·노무현·정몽준 등 대선 후보로 바꾼 것이다. 말투뿐만 아니라 성격도 독특해서 모사하기가 쉬운 3김에 비해 세 후보는 개성이 뚜렷하지 않아 쉽지 않았지만 그는 기어이 정치 풍자 패러디의 세대 교체를 이루어 냈다.

배씨는 노대통령과 비슷한 시련도 겪었다. 국민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출되고도 지지율이 하락해 후보교체론에 시달렸던 노대통령처럼 그도 정치인 음성 모사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도 노통장(개그맨 김상태)에게 선수를 빼앗겨버리는 바람에 잊힐 뻔했다. 노통장이 <개그 콘서트>에서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노대통령 말투 흉내 내기의 적자로 떠오르는 동안 그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다행히 ‘3자 토론’에서 한 수 위의 정치 풍자를 선보이면서 그는 추격에 성공했다.

미국의 경우 웬만한 정치인이 하는 말보다 유명 코미디언이 그 말을 풍자하는 것이 더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방송가에서는 그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인물로 단연 배씨를 꼽는다. 정치 풍자 코미디를 부활시키고 3김 청산까지 이룩한 배씨가 ‘개그 대권’까지 거머쥘 수 있을지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노대통령과 뜻을 같이했던 정치인들이 새 정부 주역으로 떠올랐듯이 배씨의 정치 풍자 외길에 동참한 동료 개그맨들까지 빛을 보고 있다. 이회창 후보 역을 맡은 박명수씨나 권영길 후보 역을 맡은 김학도씨 모두 요즘 데뷔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배씨의 선전으로 그동안 <개그 콘서트>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MBC도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노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을 때 배씨는 여러 정치인의 목소리를 모사해 대신 축사를 전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노대통령과 희비가 엇갈리는 길을 걷게 될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정부가 잘하면 배씨는 비꼴 것이 없어 괴로워지고, 잘못하면 그만큼 패러디 소재가 늘어 즐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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