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없다고 평화는 아니다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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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전쟁 계기로 본 평화학/9·11 테러 이후 정치적으로 오용되기도
"미국 국민과 동맹국들은 대량살상무기로 평화를 위협하는 무법 정권을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부시 미국 대통령, 3월19일 개전 연설) “우리는 위대한 국가입니다. 우리 군대에게 평화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3월24일 국영 텔레비전 연설) “평화는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세계의 평화도 함께 이끌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틱낫한 스님, 3월18일 방한 기자 회견)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에 쓰인 ‘평화’에 대한 다양한 용례다. 이들 문장에 들어 있는 평화라는 말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도대체 어떤 평화가 진짜 평화일까?

‘평화라는 대단히 새로운 문자’가 동양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92년. 일본의 평화운동가 기카무라 도코쿠가 <평화>라는 잡지를 창간하며 ‘Peace’를 ‘평화’라고 번역하면서부터다. 창간사에서 그는 ‘종교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인간의 양심이 세계를 떠나지 않는 한, 우리는 평화가 반드시 원대한 문제라는 것을 믿는다’고 썼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다. 동양에서 평화라는 말은 이렇듯 종교와 신념의 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원적지인 서양에서도 이 단어는 근대의 산물이었다. 중세의 암흑기를 뚫고 근대 계몽주의가 태동하면서, 다시 말해 ‘이성’이 승리하면서 평화는 자신의 호적을 얻었다. 그러나 서양어 ‘Peace’는 한자어 ‘평화’처럼 고상한 형이상학적 용어로만 쓰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제 정치의 영역에 속한 ‘세속어’에 가까웠다. 유명한 전쟁사가인 영국인 마이클 하워드는 근작 <평화의 발명>에서 이 이성의 산물이 서양의 근·현대사에서 어떻게 현실의 세계에 뿌리 내렸는지를 냉정하게 천착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적 의미의 평화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출발했다. 칸트는 전쟁이 아닌 상태와 평화는 다르다고 보았고, 전쟁보다 훨씬 복잡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구체적인 지침을 만들었다. △전의를 숨긴 채 평화조약을 맺어서는 안되며 △한 독립 국가가 다른 국가를 취해서는 안되고 △상비군은 폐지해야 한다. 또한 △분쟁을 위한 국채 발행을 해서는 안되고 △타국의 헌법 체제나 정권에 폭력적으로 간섭하지 말며 △암살이나 반역 선동 등 신뢰를 깨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공화정 체제의 국민 국가로 구성된 세계가 평화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요소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창설된 국제연맹이나 2차 세계대전 직후 결성된 국제연합 체제는 칸트식 평화 공식이 현실에 도입된 것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나 1991년 페르시아 만 전쟁 때 유엔이 ‘국제 평화를 위해’ 미국의 지휘 아래 뭉친 것 역시 칸트식 평화의 20세기판 응용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근대적 의미의 평화는 ‘국가 혹은 세계의 안전 보장’을 뜻했다. 레이몽 아롱은 “국제 정치학은 평화의 학문이자 전쟁의 학문이다”라는 말로 이를 적절하게 설명했다. 냉전 시대는 ‘평화=안보’ 논리를 적절히 배양하고 성장시켰다. 군축과 전쟁 억지를 위한 군사력 강화가 ‘평화학’에서 동등한 주제로 논의되었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물론 평화라는 주제가 정치가나 정치학자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평화에 대한 것이다. 냉전이 지속되면서, 구약성서 <이사야>에 뿌리를 두었든 혹은 휴머니즘에서 기인한 것이든,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제3 세계의 빈곤이 알려지면서 ‘전쟁 없는 비평화 상태’(인도 출신 평화학자 다스굽타)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현실적인 요구들이 정치학의 하위 목록에 속해 있던 평화학을 독자적인 학문으로 분리 독립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요한 갈퉁이 오슬로 평화연구소를 차린 때가 1959년이며, 스톡홀름 평화연구소가 설립된 때는 1966년이다. 또 퀘이커 교도의 후원으로 네덜란드 그로닝겐에 국제평화연구학회가 설립된 것은 1964년이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나 틱낫한 스님 등 종교 지도자들이 반전 평화 운동 대열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면서 20세기 초 마하트마 간디가 실천했던 ‘비폭력 저항’이 평화운동의 실천 모델로 되살아났다. 이때부터 평화학과 평화운동은 불가분 관계를 맺었고, 평화라는 개념에도 종교와 신념의 기운이 깃들기 시작했다.

특히 요한 갈퉁이 주장한 ‘적극적 평화’라는 개념은 평화학이나 평화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평화를 ‘전쟁뿐 아니라 사형제도, 경제 제재, 여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모독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고, 이런 구조적인 폭력을 없애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평화는 목표가 아닌 과정 자체이며, 모든 행동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탈냉전 시대가 오자 평화에 대한 상이한 두 견해가 화해하는 듯했다. 안보학과 평화학이 합쳐 ‘인간 안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한국도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코펜하겐 유엔사회개발정상회의에 참석하면서 동참했다. 또한 1999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서는 군축과 무력 분쟁 방지 등 전통적인 평화운동 주제들 외에 인간 안보, 소수자 인권 보호, 인종·성·종교적 평등, 슬로푸드운동과 유전자변형식품 반대, 식량 나누기, 마약 반대 등 새로운 평화운동의 이슈들이 토론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자마자 복병이 등장했다. 9·11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평화에 대한 탐구를 냉전 이전으로 후퇴시켰다. 정치가나 정치학자의 입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이전보다 훨씬 더 모호하고 정치적으로 쓰인다. 반면 평화학자들이나 평화운동가들은 훨씬 근본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세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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