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가 완당을 따른 뜻 무얼까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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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연구> 창간호 통해 본 허 련의 예술세계
1868년 5월, 삶과 예술에서 모두 절정기에 접어든 소치(小癡) 허 련(許鍊·1808∼1893)은 <호로첩(葫蘆帖)>이라는 화첩을 펴냈다. 거기에는 스승인 추사 김정희와 중국 명나라 말 화가 동기창(董其昌) 등을 모사한 그림 29점과 글 3점이 실려 있다.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는 찬사를 들었던 그가 환갑을 넘긴 나이에 습작기 시절에나 했을 법한 그림 모사에 다시 나섰던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종(從). 허 련의 삶은 ‘좇을 종’ 한 글자 속에 모든 것을 집약할 수 있다. 유배지로 유명했던 전라도 진도에서 몰락한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난 허 련은 32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를 만난 뒤, 그에게서 문인화풍과 추사체를 익혔다. 이후 추사가 죽을 때까지 그의 스승 모시기는 각별했다. 추사가 제주에 유배되어 있을 때 목숨을 걸고 제주까지 세 번씩이나 찾아간 제자는 그가 유일했다.

방(倣). 그의 삶이 평생 스승 김정희를 좇는 데 바쳐졌다면, 그의 예술은 스승과 선인들의 내면까지 닮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서양과 달리 동양의 예술 세계에서는 모(模·기름종이를 대고 똑같이 그리는 것)나 임(臨·옆에 놓고 베끼는 것), 방(倣·선인의 뜻을 이어 그리는 것)을 모두 창작의 한 방법으로 여겼다. 예술이란 고인의 뜻을 본받고 배우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는 원나라 때 화가인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처럼 먹을 적게 쓰면서 소슬하고 까슬까슬하게 그리고자 했다. 이는 스승 김정희가 문인화의 이상으로 삼고, 그에게도 따르도록 가르친 것이었다. 그는 문인 출신이 아닌 전문 화가였고, 화원 출신인 동료들처럼 세밀한 채색화를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린 뛰어난 그림 대부분은 채색화가 아닌 수묵화 쪽에서 발견된다. 물론 소치의 예술이 단지 선인들의 기법을 겉으로 흉내내는 데만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스승처럼 직접 시문을 지었고, 점차 자신의 출신과 다른 양반 문인들의 정신 세계에 동화되어 갔다.


19세기는 소수의 특권 계층에서만 누리던 상층 문화가 전국으로 퍼져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고급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는 날로 높아갔다. 이런 시대 배경이 추사의 제자이던 그를 띄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감히 추사의 그림을 얻어 볼 수 없던 지방 향반들은 추사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소치의 그림에 환호했고, 그럴수록 그 또한 더욱 문인화풍에 매달렸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조선 사회가 내외의 격변에 휩싸이면서 근대적 시민 계급이 형성되려 하던 시기였다. 추사는 실사구시의 시대 정신을 추구한 학자였으며, 양반이 아닌 중인들까지 제자로 거두고 교류한 당대의 선진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소치를 비롯해 추사를 배우고 따랐던 여항문인(閭巷文人·중인 출신 예술인) 대부분은 음풍농월하며 양반의 풍류를 좇았을 뿐, 세상의 격랑에서 비켜서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구한말 화가인 소치 허 련의 삶과 예술을 집중 조명한 부정기 간행물 <소치 연구>(소치연구회 편, 학고재) 창간호가 나왔다. 지방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조선 말기 예술계에서 중추 구실을 했지만, 그동안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소치의 삶을 입체적으로 부각한 최초의 작업이다.

소치 연구가인 김상엽씨(영산대 겸임교수)는 “지금까지는 완당(김정희)을 중심으로 19세기 예술사를 관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밑에서부터, 곁가지부터 들여다보는 방식을 택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문화의 전개에 적극 참여하여 문인화의 창작 이념과 성향을 확대·심화한 여항문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조선 후기 예술사를 읽는 또 다른 키워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치가 당대의 중인 출신 화가로서는 유일하게 자서전을 냈고,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소치연구회 회원들은 <소치 연구> 창간호에서 추사가 제자들의 그림과 글씨를 품평한 기록인 <예림갑을록(藝林甲乙錄)> 원본을 최초로 공개했다. 이를 통해 추사가 제자들의 그림을 품평한 해가 지금까지 알려진 1839년이 아니라 1849년이라는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근대 미술사의 연표 수정도 불가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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