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 사극 물렀거라 ‘발칙 황당’ 납신다”
  • 노순동 (soon@sisapress.com)
  • 승인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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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 시대극 <스캔들> <황산벌>…기존 사극과 차별화 선언
한복 입은 배우들의 자태가 유난히 곱다 싶은데, 제목이 수상하다. <스캔들>. 사극에 영어 제목을 붙여준 것도 모자라, 내용도 열녀문을 하사받은 정절녀를 ‘자빠뜨리는’ 모략에 관한 이야기란다. 맛보기로 선보인, 전설적인 요부 조씨 부인(이미숙)의 표정 연기도 가관이다. 가마 속에 웬 남정네와 함께 탄 조씨 부인, 시치미를 떼며 말한다. “아니, 그게 어느새 그렇게 커졌답니까?”

그에 비하면 영화 <황산벌>은 삼국 시대 마지막 전쟁인 황산벌 전투를 소재로 삼아 제법 사극다운 면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홈페이지 대문에서 안내를 하겠다고 버티고 선 계백장군(박중훈)의 인사말은 이런 기대를 보기좋게 배반한다. “아, 싸게 싸게 오시드라고.”

애당초 장엄 사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두 작품이 오는 10월 정면 대결을 벌인다. <스캔들>은 발칙함과 시각적인 쾌감을, <황산벌>은 장군들의 인간 선언을 포인트로 잡는다. 개성이 각별해 보이는 두 작품에서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기성 사극과 차별화를 선언했다는 점이다. 두 작품의 제작진은 하나같이 기존 사극, 특히 방송 사극에 대한 염증을 숨기지 않았다.

영화 <스캔들>은 사극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하다.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삼고 있는 데다, 영화 <정사>와 <순애보>에서 모던 감각을 한껏 떨친 이재용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무슨 속셈일까. 이재용 감독은 “시각적으로 멋있는 사극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어려서 보았던 사극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라고 고백했다.
충성이나 효, 정절 등 유교적인 덕목을 강요하는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볼품없는 그림에도 염증이 났었다는 것이다. “‘성은이 망극’ 어쩌고 하면서 나일론으로 된 치마 저고리를 입고 있는 것도 거슬렸다. 평소 프랑스 상류 사회 사람들 간의 유혹과 배신에 관한 이야기인 원작에 끌리던 차에, 비슷한 일이 지구의 정반대편 조선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다행히 이야기를 수평 이동시켜 보니 정조 시대와 맞아떨어졌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였고, 복식으로나 풍속으로나 욕망에 솔직한 시대였으니 이야기의 배경으로는 맞춤이었다.

문제는 각색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달리 조선에는 남녀가 섞이는 사교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살롱 문화도 없었다. 남녀가 만나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남녀상열지사를 전개할까. 그 벽을 넘으려다 보니 더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래서 원작은 유혹을 받는 이가 유부녀이고, 은밀한 거래를 제안하는 이가 과부인데 이 설정을 살짝 바꿔치기했다. 사대부가의 귀부인인 조씨 부인(이미숙)이, 사촌인 천하의 바람둥이 조 원(배용준)을 동원해 수절 9년 차인 정절녀 숙부인(전도연)을 유혹해 달라고 부탁하는 얼개가 짜인 것이다.
<스캔들>은 시각적인 쾌감에 대한 욕심이 컸던 탓에 제작비의 절반 가까이를 미술에 쏟아부었다. 의상·세트·소품 등에 20억원 이상을 들인 것이다. 제대로 된 우리 것은 너무 값이 나갔다. 무소뿔로 장식한 화각함 하나가 3천만원. 웬만한 조연 배우 옷까지 모두 손바느질로 맞춤 제작을 하고 보니 수백만원짜리 옷이 무려 1백20여 벌이었다.

제작진은 영화 <순수의 시대>와 같은 양식미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미술 감독을 맡은 의상 디자이너 정구호씨도 기존 사극에 비슷한 갈증을 느껴오던 차였다. 이재용 감독의 전 작품 <정사>와 <순애보>는 물론 스릴러 <텔미섬딩> 등에서 섬세한 디자인 감각을 보여주었던 그는 당시 풍속화를 참고하며 주인공들의 욕망을 시각화하는 데 주력했다. 공을 들인 만큼 시원한 눈맛을 기대해도 좋다는 것이 <스캔들> 제작진의 자랑이다.

영화 <황산벌>도 기존 사극에 대한 전방위적인 반감에서 출발한, 삐딱한 사극이다. 삼국 시대 각 지역은 고유의 사투리를 썼을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다. 혹시 최근 스크린을 통해 기세를 떨치고 있는 지방 사투리 유행세에 편승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런 혐의는 거두어도 좋을 듯하다.

무려 5~6년 전에 기획이 시작된 것이다. 기획자는 조철현씨(씨네월드 공동대표). 어리버리한 남파 간첩을 통해 레드 콤플렉스를 옆차기로 날려버렸던 <간첩 리철진>, 조폭뿐 아니라 스님까지 인간 선언을 하게 만들어 관객 4백만 명을 그러모은 <달마야 놀자>가 모두 그의 머리 속에서 나왔다. 모두 소재에 접근하는 발상이 신선해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이다.

조씨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영화 <황산벌>에서도 그의 엽기적인 상상력은 계속된다. 황산벌 전투는 신라의 김유신 장군에게는 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명장이라는 훈장을, 계백 장군에게는 위엄 있는 패장이라는 명예를 안겨준 전쟁이다. 하지만 조씨는 묻는다. 후대의 필요 때문에 그 인간들에게 너무 거창한 꼬리표를 달아주고, 그 이미지를 계속 소비해온 것은 아닐까?
괜한 시비가 아니다. 그는 어차피 삼국 통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세를 끌어들인 껍데기뿐인 통일이라는 비난에 동조할 생각도 없다. 새로운 패자 당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정세가 재편되는 시기에 마무리 전쟁일 뿐이었다는 것이 그의 ‘쿨’한 진단이다.

솔직히 현실적인 계기도 있었다. 기획안을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그는 지난 총선 때 개표 방송을 보면서 또다시 표출된 지역 대결 표심에 ‘찐하게’ 절망했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는 역사 속에서 현재와 가장 유사한 때가 삼국 시대임을 떠올렸다. ‘골치가 아픈 문제일수록 가슴을 치며 반론을 펴기보다는 살짝 비켜서 보는 게 낫다.’ 그는 장난기를 발동해 보기로 했다.
그렇더라도 유례 없이 처절했던 황산벌 전투가 어떻게 코미디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그는 두 장군에게 덧씌워진 훈장을 떼어내면 인물들이 절로 코믹한 상황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보았다. “장군들은 원래 동물적으로 승부욕에 몸을 떠는 사람들이다. 지면 죽도록 싫고, 이기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그런 발상 때문에 다섯 번에 걸친 격전은 가벼운 게임처럼 묘사된다. 욕 싸움을 하기도 하고, 두 장군이 병졸을 말(馬) 삼아 인간 장기를 두기도 한다. 내친 김에 평소 사극이 보여준 여성에 대한 판에 박힌 묘사도 비틀어 보인다.

“계백의 아내 처지에서 보자. 계백처럼 무훈이 혁혁한 맹장이라면 평소 가정에 충실했을 리 없다. 그런 남편이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며 죽어줘야겠다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을 때 계백의 처는 솔직히, 인간적으로,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굳이 웃기려 할 필요도 없이 처의 심경을 드러내면 저절로 코미디가 된다.”

제작진은, 오히려 제작 과정에서 역사가 책 속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았다. 충남 연산 지역으로 현장 답사를 나갔을 때 일이다. 황산벌이 어디쯤일까 가늠하느라 현지 주민들에게 물었다. 하나같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한 노옹이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며 일러주더라는 것이다. 조씨는 그 노인이 나온 곳을 보고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경주 김씨 종친회.’

계백 장군이 어느 지역 사투리를 쓸까 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백제를 대변하는 그에게 진한 전남 사투리를 쓰도록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충청도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계백은 부안 사람이니 충청도 사투리를 써야 한다. 이런 데서까지 차별하면 안된다.’ 결과적으로, 계백은 충청도 말투와 유사한 전북 사투리를 쓰게 되었다. 의견을 수렴했느냐고? “(박중훈이) 전라도 사투리를 어설프게 하니 저절로 그렇게 되더라.” 이거야말로 믿거나 말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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