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무대 오르는 ‘원전 음악’ 물결
  • 노승림(<월간 객석> 기자) ()
  • 승인 2003.11.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것이 좋은 것이여”/“근·현대 고전 음악의 진정한 르네상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던 바로 그 시간, 암흑 속에 잠들어 있던 서양 문명은 ‘르네상스’라는 기지개를 켰다. 잊힌 고대 그리스 문명의 ‘부활’을 꿈꾸며 시도되었던 이 문예부흥운동은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의 학문과 예술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음악만은 사정이 달랐다. 이 시기, 모든 예술 가운데 유일하게 ‘부활’에 실패한 장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무형의 음악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지난 10월 내한해 두 차례 콘서트를 가졌던 스페인 출신 고음악 연주가 조르디 사발은 “사실 음악이란 장르에서 ‘르네상스’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서양 음악은 다른 장르 예술과 달리 뒤를 돌아볼 사이 없이 수천 년 동안 오로지 앞만 보고 ‘진보의 길’만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중반 영국과 중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원전 음악 운동’은 그런 의미에서 음악으로서는 처음 맞이한 진정한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음악을, 당대 악기를 복원해 당대 스타일로 연주하는 것을 기본 모토로 하는 원전 연주 운동은, 사실 조셉 페티를 비롯한 몇몇 음악학자들이 처음 운을 띄웠을 때만 해도 고고학적 발굴의 의미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저 학문적인 업적에 그칠 수 있었던 이 움직임은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지기스발트 쿠이켄·구스타프 레온하르트를 위시한 일부 선구자들의 적극성에 의해 실제 연주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엔드 핀이 없이 다리 사이에 끼우고 연주하는 바로크 첼로, 밸브 없는 트럼펫, 철 대신 양의 창자로 만든 거트현을 감은 바이올린으로 무장한 이들의 연주는 곧 연주계 전체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기존 낭만 스타일을 거부하는 그들의 연주는, 음악의 역사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단절되고 변화했을 뿐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악기로 옛날 음악 100% 재현

원전 연주가들은 그들이 쓰는 원전 악기가 현대 악기의 전신이 아니라 연주법 자체가 전혀 다른 별종 악기이며, 현대 악기로는 당대 작곡가들의 철학과 음악 스타일을 100% 재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발은 오히려 그 현대 악기의 출현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요즘 보는 악기들이 대체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인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근·현대 작곡가라고 하는 드뷔시 시절의 악기조차 지금과는 다른 모양과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1957년 현대 첼로의 대부라 불리는 파블로 카잘스의 첼로만 해도 초창기에는 거트현이며 브리지며 모두 원전 악기에 가까웠다.”

서양 음악의 연대기별 단절은 그 시대의 풍조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만 하더라도 서양 사람들은 이전 시대 음악가들의 음악에 대해 무지했고 관심조차 없었다. 자기 시대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풍조는 슈만·바그너 등이 등장한 낭만주의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모차르트의 경우 요절하기 얼마 전에야 바흐의 평균율 악보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현대인의 감정과 사상과 환경을 완전히 무시한 극단적인 주장’이라며 크게 배척당했던 원전 연주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세력을 오히려 확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바흐 서거 250주년을 맞이했던 2000년에는 바흐 음악 복원에 관해 새로운 해석이 나와 연주계의 중추를 흔들기도 했다. 특히 바로크와 고전주의 시대 음악에 관한 그들의 해석은 현대 악기 연주가들 사이에서도 커다란 설득력을 발휘하여 ‘대세’로 인정받고 있는 상황이다.

오는 11월7일 금호아트홀에서 일본 원전 악기 앙상블인 컨버줌 뮤지쿰의 연주를 시작으로 국내에서도 원전 악기 연주가 이어진다. 11월8일 영국의 원전 오케스트라인 계몽 시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빅토리아 뮬로바 또한 모던 바이올리니스트 출신으로 원전 연주에 감화를 받은 인물 중 한 사람이다(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1월25일부터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일 캐나다 오페라 아틀리에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는 기악에서 출발한 원전 운동이 성악과 극예술로까지 이어진 성과를 증명할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