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최인호의 힘' 보여준 장편<상도>
  • 이문재 ()
  • 승인 2000.12.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편 <상도>, 움츠린 독서계 강타… 조선 거상 통해 ‘인간의 길’ 탐구
출간 보름 만에 소설 베스트 셀러 목록에 진입했다. 뒤늦지도, 때이르지도 않았다. 눈 밝은 편집자들은 <한국일보>에 연재될 때부터 ‘감’을 잡고 있었다. 밀리언 셀러감이었다. 지난 11월 초순, 소설가 최인호씨(55)가 연재했던 원고에서 1천5백장 가량을 덜어내며 새로 다듬은 장편소설 <상도(商道)>(전 5권·여백)를 서점에 선보이자, 일반 독자보다 먼저 기업체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휘청거리고, 한때 세계를 경영하겠다던 그룹 회장이 잠적하는가 하면, 제2의 IMF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드리워 있는 마당에, 이 땅에도 존경받을 만한 장사꾼이, 그리고 오늘에 되살려야 마땅한 경영 철학(상도)이 있었다는 사실은 말 그대로 ‘복음’이 되기에 충분했다.


기업가 소설에서 역사·종교·예술가 소설로 변모

출판사측에 따르면, 11월 하순부터 기업체에 이어 일반 독자들이 책을 찾기 시작했다. 대형 서점 베스트 셀러 목록에 성큼 올라선 것이다. <상도>가 일으키고 있는 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반갑다. 우선, 작가가 의도한 대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경제의 신철학’을 함께 모색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불황과 대중 문화의 위세에 잔뜩 주눅 들어 있는 문학출판계가 ‘최인호의 힘’으로 재기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출판계에서는, <상도> 같은 성격의 소설이 주목되면, 책읽기를 외면했던 성인 남성 독자들이 서점을 찾아, 출판계가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상도>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미덕은 소설 <상도> 내부에 있다. 이 소설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이야기 그 자체’이다. 여러 개의 소설이 겹쳐 있다. 자동차에 미친 거평그룹 김기섭 회장의 돌연한 사고사 소식을 접하는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야망과 도전을 모티프로 하는 기업가 소설의 외피를 쓰고 출발하지만, 2백 년 전 실존했던 조선 최고의 거상이자 거부였던 임상옥(1779~1855)의 삶을 복원하면서 기업가 소설에서 역사 소설·종교 소설·예술가 소설로 변모를 거듭한다.

최인호씨는 “작정을 하고 썼다”라고 말했다. <잃어버린 왕국> <왕도의 비밀> <길 없는 길>의 연장선에 서되,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배가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번 소설의 재미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임상옥의 상도와 만나는 데 있지만, 그 상도는 추사 김정희의 학예와 손잡으며 부피를 늘리고, 석숭이라는 선승 휘하에서 상술을 상도 차원으로 승격시킨다. 비운의 혁명가 홍경래를 수하에 두면서, 소설은 급박하게 평북 산하를 누비고, 이 와중에서 운명적인 사랑의 불씨가 태어난다.

소설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가속도가 붙는데, 그때마다 ‘어디까지가 사실(역사)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소설)인지’ 구분하기가 난감해진다. 특히 중국 상인들의 불매 운동이나, 임상옥과 추사 김정희와의 우정, 홍경래와의 관계, 추사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상업지도>라는 그림, 임상옥의 문집 등등. 최인호씨는 “한 독자가 소설 속에서 추사가 그렸다는 <상업지도>라는 그림의 실체를 찾아보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소설가로서 기분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독자들이 ‘진실로 여기지 않는’ 역사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에 가까운 것이다.

작가는 사실과 허구 여부를 밝히는 일은 독자의 몫이라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임상옥과 추사의 인연이나, 석숭이라는 인물, 홍경래란의 그늘에서 태어난 비운의 여인 송이 등은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밝혔다. 임상옥에 대한 1차 자료는 거의 없었다. 임상옥이 남긴 시 서너 편, <조선왕조실록> 몇 대목 따위가 거의 전부였다. 최씨는 “자료가 많았다면 내 상상력이 구속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쓰면서 무릎을 칠 때가 많았다. 인물과 사건이 알아서 줄달음쳐 나갔다”라고 말했다.

의주 상인 임상옥은 위기를 세 번 거치며 인간의 길을 완성한다. 첫 번째 사업에서 실패한 뒤 한때 출가했던 임상옥은, 스승 석숭 스님으로부터 세 가지 화두, 즉 죽을 사(死)자, 솥 정(鼎) 자, 그리고 계영배(戒盈盃)라는 작은 찻잔을 받아들고 상업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소설은 절체절명의 위기와 세 번 마주치는 임상옥이 세 가지 화두를 풀어내며 거부가 되는 과정이다.

임상옥은 솥 정자 화두를 풀어 두 번째 위기, 즉 홍경래란으로부터 한 걸음 벗어나, 계영배(흘러넘치는 것을 경계하는 잔)의 비밀을 찾아가면서 역사 소설에서 예술가 소설로 차원을 달리한다. 천애 고아였던 도예가의 일생을 추척하는 것인데, 그가 바로 그의 일생을 ‘예정’해 놓은 석숭 스님이었다.

예술가 소설은 또 있다. 추사 김정희가 북경에서 두 스승을 만나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는 장면이나, 임상옥이 충청도에 머물러 있는 추사를 찾아가 인간이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욕망(권력욕·재물욕·명예욕)을 깨닫는 대목도 예술가 소설의 향기가 짙다. 석숭 스님을 중심으로 했던 종교 소설은 소설 후반부에서 임상옥의 연인이었던 송이가 순교하는 데에 이르러 천주교로 ‘개종’한다.

임상옥의 상도는 단순하지만 실천하기란 거의 힘든 것이다. ‘상업이야말로 곧 사람(商卽人)’이라고 주창했던 임상옥의 유언은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였다. 물과 같은 재물을 독점하려는 재산가처럼 어리석은 자가 없으며, 저울과 같이 바르고 정직하지 못한 재산가는 그 재물에 의해 파멸한다는 교훈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최인호씨는 “이번 소설을 쓰면서 소설 쓰기의 한 길[道]을 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책을 한번 잡으면 놓지 못하게 하는 ‘이야기꾼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친절한 소설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잊을 만하면 지난 줄거리를 환기해 주고, 소설의 복선 또한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작품은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는 문학 이론을 믿는 독자들은 웬만하면 손에 잡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만큼 ‘정신 없이’ 읽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