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재일 동포 윤건차 교수의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
  • 이종구(성공회대교수,사회과학부) ()
  • 승인 2000.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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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탈식민’ 시각 돋보여
윤건차 교수의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을 읽으면서 역작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은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권에 직접 간접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지식인들의 사상과 주장을 검토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윤교수의 끈기에 놀랐다. 진보적 지식인의 세계를 비교적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필자도 ‘이러한 논객과 주장이 있었던가?’하고 생각할 정도로 모든 진보 담론을 집대성하고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두 가지 척도에 입각해 자리매김을 해 놓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97년 말 외환 위기, 김대중 정권의 개혁, 남북 관계 등에 이르기까지 중요 현안에 대한 국내 논의가 날카로운 시각으로 정리되어 있다. 현실 사회운동에 대한 입장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이러한 논의 내용을 분석하는 작업은 어차피 누구인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윤교수가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국내의 복잡한 인간 관계에 얽히지 않고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경계인’의 위치에 놓여 있는 재일 동포 연구자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에서 가장 많은 지면이 할애된 부분은 1980년대 후반기에 전개되었던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과 사회 변혁 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한 사회구성체 논쟁이다. 윤교수는 긴 호흡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 주요 논쟁 참가자들의 주장과 계보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평가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 이 작업은 논쟁 당사자가 아니면 웬만한 지식인이나 활동가 들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얽히고 설킨 내용을 끈기 있게 해독했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현대 한국의 지성사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자료 정리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윤교수가 다음으로 역점을 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 대한 분석이었다. 현실 사회의 계급적 모순이 노출되어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구미의 각종 포스트 담론이 현실 분석이나 사회운동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비판적 지적이 제시되었다. 심지어 국내 진보 진영에 속한다고 자처하는 논객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우상의 정체가 간단하게 폭로되었다. ‘탈근대’와 ‘탈식민’을 등치시키는 윤교수의 시각은 국내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민족 문제와 아이덴티티 확인이라는 과제를 안고 사는 재일 동포 연구자이기 때문에 제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거론된 논객의 대표성이다. 윤교수가 분석한 대상은 대학 조직의 일원이거나 최소한 공개 활동을 하는 사회운동 조직에 있는 인사들의 글이다. ‘기록물’ 수준을 벗어나려면 지식인의 담론이 반영하고 있는 상황과 운동의 실체적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공감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정확하게 말해 운동의 ‘동반자’나 ‘후원자’였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일선 현장에서 고생하는 활동가에 대한 부채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술운동도 노동운동 못지 않게 사회 변혁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기 확인이 필요했다.

즉 담론의 선명성과 운동의 현실 적합성은 구분되어야 하며, 정파성이라는 변수의 영향을 감안해야 한다. 출판물을 자료로 삼아 민주화운동을 이해하려고 시도한 윤교수도 관광객이 멋있는 빙산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동안 수면 아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충돌 사고를 피하기 위해 고민하는 선장에 못지 않게 마음 고생을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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