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정가제 논란, 끝이 안 보인다.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10.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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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 ‘할인 업체에 책 공급 중단’ 결의
입법화 여부를 둘러싸고 출판계와 인터넷 서점이 팽팽히 의견 대립을 빚고 있는 ‘도서 정가제’ 논쟁이 마침내 이해 당사자들의 실력 행사로 치닫고 있다.

국내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 모임인 한국출판인회의(대표 김언호)는 10월12일 회원 출판사 대표 긴급 총회를 열어 문화관광부가 최근 입법 예고한 도서정가제의 정식 법제화(현재는 공정거래법상 예외 조항)를 지지하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아울러 출판인회의는 현행 도서정가제를 ‘사수’하기 위해 초강경 수단을 동원하기로 결의했다. 10월16일부터 책값을 할인해 판매하는 업체에 책 공급을 일절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0월6일 출판·서점계와 인터넷 서점, 양측 관계자들이 모여 도서정가제를 놓고 열띤 찬반 토론을 벌인 지 6일 만의 일이다.
출판인회의는 이와 별도로 장래에 있을지도 모를 내부 이탈자를 제재할 방침도 논의했다. 이 중에는 총회 결의를 따르지 않고 인터넷 서점에 책을 공급하는 회원사에 대해 ‘불매 운동’을 벌인다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다.
대립 구도의 다른 한 축에는 최근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인터넷 서점들이 포진해 있다. 현재 이들은 출판계의 이같은 ‘선전 포고’에 대해 겉으로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물밑 상황은 다르다. 몇몇 서점 대표를 중심으로, 출판계가 장담한 집단 행동이 실현될 경우 이를 공정거래법상 ‘경쟁 제한’ 및 ‘담합 행위’로 몰아 강력 대응하는 일전
불사의 역공책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는 1998∼1999년 예스24·알라딘 등 본격 온라인 서점을 표방하는 인터넷 서점이 출현하면서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이들 인터넷 서점이 고객 봉사 차원에서 책값을 10~20%씩 깎아 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출판계 일각에서는 인터넷 서점의 이같은 판매 행위에 대해 ‘자칫 할인율 경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며 우려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출판계는 우려감보다는 기대감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인터넷 서점이 출판 유통의 고질이던 어음 거래 관행을 끊는 데 일조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서점을 찾지 않았던 잠재 독자까지 개발해 출판 시장 활성화에 이바지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 1년 반 만에 출판계의 낙관적인 기대는 위기감으로 반전했다. 이는 할인율을 주무기로 삼아 영업 활동을 하는 인터넷 서점의 비약적인 신장세와 무관하지 않다. 굴지의 인터넷 서점 예스24는 사업자 등록을 내고 사업에 뛰어든 지 꼭 1년 10개월 만에 ‘하루 매출 1억원’을 호언하는 대형 서점으로 도약했다. 이 액수는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의 인터넷 서점(도서할인제를 적용하지 않음) 하루 매출액과 맞먹는 규모이다. 이보다 조금 늦게 출발한 알라딘 역시 하루 매출액이 4천만∼5천만 원을 오르내리는 대형 서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인터넷 서점의 약진은 매출액 비중으로도 확인된다. 인터넷 서점의 시장 비중을 되도록 깎아내리려는 출판계는 예스24·알라딘·크레슨스·와우북 등 인터넷 서점의 매출액을 전체의 5% 정도로 잡고 있다. 반면 되도록 시장 비중을 부풀리려는 인터넷 서점측은 시장에서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매출액 비중이 전체의 15%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한 점은, 인터넷 서점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신장세를 보이며 출판 유통의 한 축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터넷 서점 대부분이 책값 할인을 주무기로 하여 시장을 공략한다는 데 있다. 출판계는 책값 할인이 무리한 할인율 경쟁을 불러 출판 문화를 어지럽히고 종국에 가서는 출판계 전체의 파국을 부를 것이라고 우려한다. 할인율 경쟁이 본격화하면 그만큼 자본력이 있어 책을 값싸게 공급하는 대형 할인점에만 손님이 몰릴 것이 뻔하다. 또 이에 따라 중소 서점 연쇄 도산이 예상되며, 출판사들은 이같은 시장 상황에 맞추기 위해 대량 공급을 통해 할인이 가능한 이른바 ‘잘 팔리는 책’에만 주의를 집중하게 될 것이라고 출판계는 진단한다.
말하자면 책값 할인은 유통업자의 배만 불리고 공급자나 수요자에게는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출판인회의 한철희 정책기획위원장(돌베개 대표)은 “우리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도서할인제가 출판 문화의 다양성을 줄여 독자들이 책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한다는 데 있다. 이같은 예측은 한때 자유가격제를 채택했다가 숱한 부작용 때문에 다시 정가제로 회귀한 프랑스 사례에서 이미 입증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인터넷 서점측의 상황 인식은 판이하다. 이들은 출판계가 추진하고 있는 도서정가제 입법화가 실현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도서정가제를 명문화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업체를 처벌한다는 강제 조항은 현행 공정거래법은 물론 헌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내다본다. 설혹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이는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하는 반소비자적 입법의 표본이 된다는 것이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조유식 사장은 “최근 논란에서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은 인터넷 서점이 잘되면 출판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현재 출판계가 내세우는 주장은 명분론과 고정 관념에 집착한 것이라는 인상이 짙다. 또 최근 출판계 움직임의 배후에는 인터넷 서점 때문에 매출 경쟁 면에서 압박받고 있는 일부 대형 서점의 위기감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한다.

인터넷 서점측은 현재 출판계와의 싸움에 자신감을 내비친다. 논리 면에서나 실제 상황에서 불리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들은 설사 출판계나 서적 도매상이 집단 행동에 돌입한다 하더라도 자금 압박이라는 암초에 걸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으로 내다본다. 반면 출판계는 인터넷 서점측에 ‘기존 시장 질서의 규칙’을 준수하라고 외치고 있다. 쌍방간 결의와 자신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출판계와 인터넷 서점의 도서정가제 입법화 논란은 단순한 말싸움 수준을 넘어 본격적인 힘 겨루기 양상으로 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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