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 맞아 세 장편소설 <심청> 펴낸 황석영 인터뷰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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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아픈 과거 더듬었다”
작가 황석영씨가 환갑을 맞았다. 그에 맞추어 국내외 문단 선후배들이 그의 문학을 재조명하는 책 <황석영 문학의 세계>(최원식·임홍배 엮음, 창비)를 냈다. 황씨 또한 장편소설 <심청>(문학동네)을 펴내 자축했다. 12월1일 저녁,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이 두 책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잔칫상이 차려졌다.

새 소설 <심청>은, 제목 그대로 <심청전>에서 모티브를 딴 소설이다. 하지만 인당수에 몸을 던진 직후부터 시작되는 ‘황석영판’ 심청의 운명은 원전과 완전히 다르다. 되살아난 심청은 난징의 차(茶)상인 첸 대인의 첩실로 팔려가고, 그가 죽은 다음 기루(妓樓)로 넘겨진 뒤부터 창녀로서 지난한 인생 유전을 겪는다. 타이완·싱가포르·오키나와·나가사키 등지를 떠도는 사이 그녀의 이름도 청에서 연화로, 또 렌화·로터스·렌카로 계속 바뀐다. <심청>은 이렇듯 원전과는 전혀 다른, 처절하고 안타까운 생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한 한 여자의 일대기로 재탄생했다.

11월28일 오후, 회갑을 앞둔 황씨를 경기도 일산의 아파트로 찾아가 만났다.

만년 ‘문학 청년’으로 불리는데, 벌써 환갑이다. 소감이 어떤가?

벌써 환갑이 됐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환갑이야 자연적 나이지, 뭐 큰 감회랄 것은 없다. 내가 건강하다는 것이 고맙고, 또 몇 년 전부터는 제법 너그러워진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고등학생 때 <입석부근>(<사상계> 1962년 신인문학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니까, 벌써 41년이나 되었다.

문단 생활은 41년째인데, 난 공백이 많았다. 1962년에 어정쩡하게 문단에 나오긴 했지만, 떠돌아다니고 베트남 다녀오고 하느라고 글을 안 썼고,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1971년 <객지>를 발표하면서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말부터 (망명과 방북, 구속 등으로) 또다시 10년이나 공백이 있었다. 그런데도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고맙게 생각한다.

<심청>은 징역에서 세웠던 집필 계획에는 없던 작품인데, 어떤 계기로 쓰게 됐나?

몇해 전 서해로 날아가는 오리 떼를 보면서, 동양의 지중해인 서해를 무대로 매춘 오디세이아를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차에 자료를 뒤적여보니 심청 이야기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거라. 황해도 황주, 충청도 당진, 전라도 변산 등 여러 곳에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서해안 지역에서 소녀들이 사고 팔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지.

근대성 탐구가 최근 국문학계의 화두인데, <심청>의 시대 설정을 19세기 말로 잡은 것도 의도적인가?

그렇다. 심청의 인생 유전을 통해, 격변하는 동아시아 근대사를 되돌아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난 1980년대부터 동아시아 담론으로 제3세계론을 구체화하고, 동아시아의 민중 연대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구미 시각으로만 동아시아를 보았는데, 이제 시각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거다.

당시 중국과 일본의 저자거리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어떻게 취재했나?

난징·상하이·타이완·오키나와·나가사키 등 심청이 돌아다녔음직한 장소는 다 찾아갔다. 또 요즘은 일상을 기록한 역사책이 많다. 타이완에서는 동아시아 춘화 백과사전을 구했고, 일본 신주쿠 헌책방에서는 오키나와와 나가사키의 뒷골목사를 다룬 책을 찾아냈다. 자료의 무게에 눌릴 정도로 운이 좋았다(그 결과, <심청>에는 당시의 뒷골목 용어가 풍부히 실려 있다. 예를 들어 최고 기생을 중국에서는 ‘에라이샤(夜來香)’라 불렀고, 일본에서는 ‘오이란(花魁)’이라 했다. 중국에서 여자를 살 때 내는 돈은 ‘바오쭈’, 팁은 ‘홍리’라고 했다).
노골적이고 거의 해부학적으로 썼다. 인터넷에만 들어가도 포르노의 홍수 아닌가. 문학적으로 좀더 다듬은 거지.

문학 평론가 최성실씨는 최근 낸 평론집에서, ‘황석영씨를 진보적 작가라고 하지만, 그가 육체를 다루는 방식은 권력 관계 안에 놓인 그것을 넘지 못하며, 심지어 파시스트적이기까지 하다’고 지적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난 여성주의 소설을 쓰려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을 다루는 작가다. 문제는 내가 논문이 아닌 소설을 쓰는 거고, 현실은 여성이 존중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작가가 왜곡해서 여성이 존중되는 쪽으로 쓸 수는 없는 거 아닌가.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민감하게 그런 부분만 꼬집어서 말할 때는 할 말이 없다.

송두율 교수가 귀국해서 검찰 조사를 받을 때, 송씨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직후 송씨가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심경이 어땠나?

깜짝 놀랐다. 그렇더라도 내 뜻을 거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사 정보를 팔아먹지도, 스파이 짓을 하지도 않았다. 국가보안법은 유엔 인권위와 미국 국무부도 폐기를 권유할 정도로 악법이다. 한 지식인이 그런 법에 의해 고충을 겪는데, 공안 당국과 같은 논리로 그를 단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식인으로서 송두율 교수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학삐리’들은 쪼다라고 하는 거다. 책만 읽고 관념에만 젖어 있다. 후반기 인생을 국내에서 보내고 싶어 들어온 거잖아. 그럼 솔직하게 풀고 들어왔어야지. 나더러 만나서 문화 충돌이라고 그러더라. ‘당신은 분단을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한다, 옛날 같으면 당신은 죽었다’고 말해줬다.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작가 이문열씨와 대담했는데, 성과는 있었나?

말들이 많다. 나가기 전부터 주변에서 말렸는데 응했다. 수백만 독자가 있는 작가들이 서로 편가르기나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이 다르다는 걸 명확히 확인했다. 성과라면 이 사람(이문열)이 많이 풀어졌다는 거지. 친일하고 독재 정권에 붙어먹은 자들은 보수주의자에서 빼겠다고 했고. 서로 ‘우리는 자유주의자야’ 했지.

그는 1998년 출옥 이후 마치 둑이 터지듯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했다. <오래된 정원> <손님>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 장편이다. 도중에 열권짜리 <삼국지>도 번역해냈다. 집필 습관도 과거와 달라져, 그는 거의 매일 밤 10시부터 책상에 앉아 새벽까지 ‘일하듯’ 글을 쓴다. “출옥 이후 거의 매일 밤을 새웠다는 느낌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백낙청 교수는 황씨의 이런 최근 작업을 두고 ‘한국 교도 행정의 일대 승리’라고 농담삼아 말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간 영국으로 건너가 2년 정도 머무를 생각이다. “쉬면서, 영어로 내 작품 설명 정도는 할 수 있도록 공부나 하겠다”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그의 휴지기가 길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철도원 3부자 이야기’ ‘강남 형성사’ ‘바리공주 이야기’ 등 앞으로 쓸 소재를 이미 꼼꼼히 챙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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