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 그들만의 잔치인가
  • 이건수(<월간 미술> 편집장) ()
  • 승인 2003.12.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술감독 신구 조화 부족·관객과의 소통 실패로 ‘풍요 속 빈곤’
내년에는 제5회 광주 비엔날레, 제2회 부산 비엔날레, 제3회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등 국제전 3개가 국내에서 열린다. 그야말로 비엔날레 풍작의 해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미술 잔치의 풍요 속에서 허기를 느끼는 것이 비단 필자만의 감회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비엔날레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이며, 또 우리는 비엔날레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비엔날레는 흔히 미술이라는 꿈의 영역과 우리의 삶이라는 현실의 문제를 교차시키는 방식으로 꾸며지는 미술 행사다. 하지만 국내 비엔날레의 경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나 우리 삶에 대한 재해석을 끌어내기보다는 단지 미술을 양적인 대상이나 상품 가치로만 전락시켰다는 느낌이다. 이는 미술이라는 과시 수단을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의 섣부른 의욕과 미술계 안의 세력 다툼이 맞물린 결과이기도 하다. 숫자 채우기에만 급급한 듯한 전시 내용이나, 역시 관객 숫자만을 놓고 성과를 평가하는 전시 행정에 다수의 미술 애호가들만 피해자가 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비엔날레 전쟁이 어차피 시작되었다면, 또 그것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면, 매회 불특정 테마로 꿰어맞추는 식의 전시 방법보다는 각 지방의 지역성과 특수성을 살린 차별화 전략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각 비엔날레의 이사진(지자체 등 기획자 집단)과 전시를 책임지는 실행자(예술 감독 집단) 간의 영역 구분과 공조 시스템을 명백히 함으로써, 비엔날레라는 프로젝트에 만연되어 있는 공무원과 학예실 간의 대립 구조 문제를 선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예술 감독 집단의 신구 조화를 꾀하는 것이 절실하다. 세계에서 유수한 비엔날레의 리더들이 30대 후반~40대 중반 젊은층으로 세대 교체 되고 있는 현실을 비교해 볼 때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2001년 시작되었으나 단 1회의 오프닝만으로 그쳐버린 일본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무력감도 바로 이런 신구 교체 실패로 인한 현장감 상실과 전시 비전 부재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2002년에 열렸던 제4회 광주 비엔날레는 그 실험성과 도전성으로 인해 전시 내용 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관객과의 소통 차원에서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이에 비해 같은 해에 열렸던 부산 비엔날레는 부산청년 비엔날레의 전통과 바다를 접하고 있는 장소의 다양성으로 인해 관객의 접근 면에서는 더 유리한 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고, 전시의 자율성이 부각되기보다는 행정력에 ‘부산하게’ 끌려 다닌 듯한 인상을 주었다.
“비엔날레는 전시가 끝난 순간 시작된다”

원래 비엔날레는 만국박람회에서 컨셉트를 빌려온 행사로서, 답답한 전시 개념을 탈피하고 공개된 소통을 지향한다. 따라서 비엔날레의 관객은 마치 연극의 3요소에 관객이 포함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전시 내용과 관객의 취향이 상반되고 엇갈린다든지,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소통 장치에만 급급해 하는 국내의 비엔날레 현실을 보면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점은 또 하나의 미디어아트 견본 시장이 되어버린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에서도 감지되었다.

부디 내년에 열리는 세 번의 비엔날레는 관객의 삶과 미술의 영토를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것으로 격리시키는 역기능적인 행사가 아니라, 이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 가는 꿈으로서의 미술을 가능하게 만드는 순기능적인 행사가 되기를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미술에 대한 인식 변화 그리고 그 변화를 가능케 하기 위한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 각종 미디어를 통한 진짜 살아 있는 미술의 공유가 필요할 것이다. 진정한 비엔날레는 전시가 끝난 그 순간부터, 전시장 밖으로 나온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