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왜 힙합에 ‘중독’되는가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9.11.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춤·랩·미술·비트 등 다양한 요소 결합…경쟁심 자극, 솔직한 표현에 ‘열광’
헐렁한 바지는 땅을 쓸 정도로 길다. 운동화는 발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물들인 머리도 가끔씩 눈에 띈다. 지난 10월23∼24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제1회 청소년 힙합 문화제>에 모여든 이들의 모습이다. 등에 책가방을 둘러멘 채 힙합 잔치에 참여한 이들은 10대와 20대 초반. 어른이 없는 이 공간에서 그들은 자기들만의 문화를 열광적으로 즐겼다.

잔치의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 날 젊은 대중을 한자리에 끌어모은 강력한 도구는 ‘힙합(Hip Hop)’이라는 문화이다. 미국 흑인들의 길거리 문화인 힙합이 국내에 상륙한 것은 90년대 초반. ‘현진영과 와와’라는 그룹이 브레이크댄스 등을 통해 첫선을 보였고, 서태지와아이들에 의해 힙합은 젊은 세대의 상징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힙합의 한 갈래인 랩을 처음으로 시도해 ‘신세대 문화 혁명’을 일으킨 서태지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힙합과 랩의 관계조차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들어 힙합 마니아층이 두터워지면서 한국에서도 힙합이 젊은이의 유력한 문화 가운데 하나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텔레비전에서는 힙합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댄스 그룹을 찾아보기 힘들며, 의류 회사들은 앞을 다투어 힙합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힙합은 음악이라는 좁은 의미를 넘어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키는 강력한 문화적 경향으로 떠올랐다.

힙합은 70년대 중반 미국 대도시 뒷골목에서 발생한 문화이다. 하층민 거리에서 사회로부터 버림 받았다고 느끼는 흑인들이 통을 두드리며 읖조린 중얼거림이 랩으로 이어졌고, 그 장단에 맞추어 건들거리거나 엉덩이를 흔들던 춤은 브레이크 댄스로 발전했다.

힙합, 전세계 음반 시장 80% 장악

힙합은 록과 포크 같은 특정 음악 장르와 달리 음악적인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 힙합을 구성하는 요소는 크게 네 가지. 뒷골목 벽에다 스프레이로 남몰래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Graffiti) 아트’, 비보이(B-Boy)라 불리는 춤꾼들이 격렬하게 추는 브레이크 댄스, 음반을 틀면서 리듬과 비트를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디제잉(DJing), 목소리를 비트에 실어 중얼거리는 랩이 힙합을 구성하는 대표 요소들이다.

미국의 하위 문화에서 출발한 힙합은 그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지금 전세계 음반 시장의 80%를 장악하리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독일·프랑스 같은 유럽 각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클럽 문화를 통해 흑인들도 인정하는 ‘저팬 힙합’이라는 장르가 탄생했다.

‘힙합 가수=싱어송라이터’는 기본

국내에서 힙합이 크게 유행한 까닭은, 인기 있는 댄스 그룹들이 앞을 다투어 ‘힙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힙합의 전사’와 같은 카피를 내세워 방송에서 활동하는 댄스 그룹의 영향은, 젊은 대중이 힙합이라는 새로운 용어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댄스 그룹이 즐겨 입는 헐렁한 바지와, 티셔츠를 여러 개 겹쳐 입는 패션 또한 각광받는 힙합 이미지이다. 내용이 아닌 이미지만으로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10대들을 사로잡은 셈이다.
‘록 정신’이 있듯이 ‘힙합 정신’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저항’ ‘자유’ ‘일탈’ 같은 다소 추상적인 용어가 그 정신을 설명하는 데 자주 동원되지만, 힙합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솔직한 자기 표현이다. 젊은층에 강력하게 어필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힙합은 80∼90년대 흑인 문화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에게 자기 방식으로 솔직하고 진솔하게 털어놓는 문화이다. 음악이든 패션이든 마찬가지이다.” PC통신 하이텔에서 힙합 동호회를 이끄는 김지홍씨의 말이다. 이를테면, 힙합 음악을 하는 가수라면 자기를 표현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얘기이다.

음악·패션·낙서의 수준이 어떠하든 힙합은 일단 자기 고유의 목소리를 내야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전문 작사·작곡가가 써준 노래를 부르면서 힙합 그룹이라고 자처하는 인기 댄스 그룹들이 마니아 그룹에게 무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젊은층이 힙합에 열광적으로 빠져드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장르에 녹아 있는 경쟁 의식이다. 길거리에서 생성된 문화인 까닭에 힙합은 랩과 춤에서 경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디제잉에서는 물론 익명이 보장되는 그래피티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있다. 국내 그래피티 아트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노성래씨는 “경쟁적으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힙합의 전파와 발전에 크게 작용했다”라고 말했다.

힙합은 90년대 젊은층을 설명하는 유력한 경향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기성 세대 눈에는 ‘싸구려 댄스 문화’쯤으로 비칠 수도 있으나, 그들이 보지 못하는 사이에 음악·춤·패션 들을 통해 90년대 젊은층의 성향과 의식을 대변하는 문화 양식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