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이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9.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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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위주로 제작, 소재 다양해져… 어른도 공감하는 작가주의 ‘작품’ 봇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책’ 하면 안데르센 동화집이나 이솝 우화집, 그리고 학습 교재를 주로 펴내는 대형 출판사들의 백과사전 따위 값비싼 전집류가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어린이 그림책은 신데렐라·피터팬 같은 외국산 애니메이션 영화를 각색한‘만화책’과 동일시되기 일쑤였다. 이 무렵 한국의 학부모들은 타성에 젖어 있었다. 낱권으로 판매되는 어린이 그림책은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선택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다만‘애들만 보고 마는 책’을 위해 거금을 쓰느냐 마느냐만이 결정할 사항이었다.

10여 년이 흐른 오늘날, 학부모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학부모는 더 이상 전집류를 팔기 위해 느닷없이 집안을 찾아든 ‘방문 판매원’과 입씨름을 하지 않는다. 대신 학부모들은 틈 날 때마다 아이들 손을 붙잡고 어린이 전문 서점이나 시내 대형 서점으로 달려간다. 아직 일반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어린이 책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서점은 최근 몇년 사이 전국 주요 도시에 70~80 곳이 생길 정도로 빠른 속도로 퍼져 가고 있다. 대형 서점들도 꽤 오래 전부터 학습서·교재와 별도로 그림책 전문 코너를 개설해 손님을 불러모은다. 이곳에서 학부모들은 아이들과 사이좋게 책장을 넘기며‘입맛대로’ 그림책을 고른다.

이같은 풍경은 어떻게 해서 가능해졌을까. 우선 어린이 그림책을 선택할 폭이 넓어졌다. 일찍이 단행본에 눈 돌린 몇몇 출판사의 선구적인 노력 덕분에, 단행본 중심의‘어린이 그림책’이 출판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를 굳혀 가고 있다. 단행본 시장 출현은 어린이 그림책 출판이 소 품종·다량 생산에서 다품종·소량 생산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바꾸어 말해 다양화를 뜻한다.

단행본 중심 어린이 그림책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바람직한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 하나는 어린이 그림책 전문 출판사들이 엄청난 정성을 들여 단순한 ‘애들 책’이 아닌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그림책 수준을 어른도 함께 즐기고 아낄 만한 차원으로 높였다는 것이다. 어린이 그림책 시장에는 최근 전에 없던 제작 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이른바 ‘작가주의 출판’이다.

제작 기간 빨라야 1년, 늦으면 3~4년 걸려

과거 어린이 그림책은 기획에서 출판까지 6개월이면 족했다. 그나마 대부분 출판사 의도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획된 출판이었다. 그림 작가들도 출판사의 기획에 맞추어 마치 붕어빵 찍어내듯 그림을 그렸다. 이렇게 해서 완성한 책을 작가 이름보다는 출판사 이름을 앞세워 서점에 냈다. 이같은 풍토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으로서의 그림책, 그 자체였다. 그림이든 글이든 작가가 설 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요즘 나오는 그림책은 철저히 작가 중심의 그림책을 표방한다. 작가가 자기 이름을 걸고 ‘작품’을 내므로, 당연히 그림책 제작에 들이는 품이나 시간도 늘어나고 있다. 웬만한 전문 출판사의 어린이 그림책은 제작 기간이 빨라야 1년, 늦으면 3∼4년 만에 완성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어린이 그림책에 정성을 쏟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성실 이사는 “정성 들인 책들이 다채롭게 나오면서 아이나 학부모의 선택 폭도 넓어졌다. 심지어 일부 학부모 사이에서는 특정 출판사의 그림책을 선호하는 이른바 ‘마니아’도 생기고 있다. 어린이 그림책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한 현상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이호백 글·이억배 그림)으로 유명한 재미마주가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펴낸 〈삼촌과 함께 자전거 여행〉은 어린이 그림책 출판이 어떤 노력 끝에 나오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일곱 살 이상 초등학교 저학년생을 주요 독자로 하는 이 책은 재미마주의 학급 문고 시리즈로 나왔다. 그림은 비교적 신인 축에 속하는 김동성씨가 그렸고, 글은 동화 작가 채인선씨가 썼다. 1년 여 작업한 끝에 글과 그림 원고가 모두 탈고되었으나 이 책은 바로 출판될 수 없었다. 마무리 작업으로 가편집 상태에서 책을 검토하던 중, 작품의 주요 배경이 되는 자연 묘사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는 의견이 나와 처음부터 다시 작업했던 것이다.

〈보리 어린이 식물 도감〉 〈보리 어린이 동물 도감〉 등 세밀화 시리즈로 이름이 높은 보리출판사, 〈강아지 똥〉(권정생 글·정승각 그림)으로 탄탄한 입지를 굳힌 길벗어린이 출판사, 그리고 단행본 그림책 출판이 불모지이던 상황에서 일관된 방향과 과감한 투자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온 보림출판사도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재미마주와 비슷한 일을 늘상 반복하는 출판사들이다.

얼핏 보기에 이들 출판사는 닮은 데가 많다. 길어야 10년 남짓한 출판사 설립 역사가 그렇고, 소규모 자본으로 ‘열의’만 갖고 어린이 그림책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점도 그렇다. 어린이 그림책에 관한 한 출판계의 흐름을 적지 않게 바꿔놓는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이들은 문화적 자존심이 세다. ‘이제는 우리 땅, 우리 작가의 눈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한다’는 데 이들의 의지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같아도 그곳을 찾아가는 방식은 다르다. 예컨대 재미마주가 어린이 그림책의 ‘예술성’에 좀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반면, 보리출판사는 ‘철학적 원칙’을 더 강조한다. 그리고 보림출판사가 다양한 ‘시리즈’를 시도하는 반면, 길벗어린이는 현실 세계의 ‘우리 정서’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더 강세를 보이는 식이다.

이른바 ‘대안 교육’의 이름 난 실천가인 윤구병씨가 중심이 되어 91년 탄생한 보리출판사는 도토리기획의 이태수씨를 만나면서 어린이 그림책의 새 지평을 열었다. 보리출판사의 운영 방침은 ‘우리 땅에 사는 모든 아이들이 눈으로 직접 우리 땅의 동식물을 확인하고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세밀화 시리즈’로 잘 알려진 보리출판사는 그동안 한국어린이도서상을 수상한 〈보리 아기 그림책〉 외에 어린이용 동·식물 도감과 ‘계절 그림책’ 시리즈를 펴냈다.
‘좋은 그림책’에 집중 투자하는 출판사 늘어

이 중 동식물 도감은 국내 최초의 세밀화 도감으로서 5년 만에 완성된 이 분야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출판사 남우희 차장은 “세밀화 작업은 아이들에게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강점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중시하는 것은 아이들이 자연을 과학 지식 차원에서 학습하는 대신, 동식물과 자연을 자신의 삶에 통째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볼 만한 그림책이 없어 답답한 마음에 출판사를 시작했다는 길벗어린이는, 95년 출발한 이래 최근까지 그림책·동화책·백과사전 등 총 60여 종을 냈다. 길벗어린이 그림책의 주된 특징은 생활 주변에서 비교적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책으로 연결한다는 것이다.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한 일가족의 귀성 풍경을 담은 〈솔이의 추석 이야기〉와, 마당 있고 아담한 단독 주택에서 3대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사를 아기자기하게 펼쳐 보인 〈만희네 집〉, 강아지 똥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내용의 〈강아지 똥〉이 모두 이 출판사가 펴낸 화제작이다.

이 가운데 특히 〈솔이의…〉와 〈만희네…〉는 최근 일본·미국 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맺고 해외로 진출했다. 이 출판사 이호균 사장은 “기왕 책을 만들 바에야 외국 출판사 것이 아닌 우리 작가의 창작물을 내보겠다는 생각이 뜻밖에 호응을 얻은 것 같다”라고 말한다. ‘좋은 그림이 주는 감동’에 대한 욕구는 어떤 의미에서 아이들보다 학부모가 더 목말라했다는 것이다.

전통 문화를 소재로 한 ‘솔거 나라’ 시리즈와 ‘전통 과학’ 시리즈로 95·96년 2년 거푸 ‘한국어린이도서상 문체부장관상’(일러스트레이션 부문)을 거머쥔 보림출판사도 어린이 그림책 전문 출판사로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어린이 그림책 시장에 ‘창작’ 바람이 불기 전 이 출판사가 이룬 성과는 경쟁 관계인 동종 업체들조차 인정하리만큼 굳건한 것이기 때문이다. 〈숨 쉬는 항아리〉(솔거나라 시리즈 중 하나·정병락 글·박완숙 그림) 〈갯벌이 좋아요〉(유애로 글·그림) 등을 ‘베스트 셀러’로 보유하고 있는 이 출판사는, 최근 우포 늪·동강·반딧불이 등 자연 생태를 소재로 한 그림책 시리즈를 내년 계획으로 내놓았다.

재미마주는 어린이 그림책 전문 출판사 가운데 비교적 늦게 출발했으나, 기획사 시절 쌓았던 노하우로 호평받는 책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힘센 수탉〉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 등은 재미마주의 대표작. 특히 한 천덕꾸러기 초등학생의 슬픈 학교 생활을 그린 〈내 짝궁 최영대〉(채인선 글·장순희 그림)는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내 집단 따돌림’을 소재로 해 학부모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모았다. 재미마주 이호백 대표는 “작업 방식이나 그림 분위기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기성 작가보다는 숨겨진 재능, 특히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신인 작가들에게 시선을 집중할 생각이다”라고 말한다.

좋은 글·전업 작가·비평가 부족이 문제

처음부터 ‘어린이책 전문’을 내걸고 출발했던 이들 출판사와는 출신 배경이 다르지만, 나름으로 어린이책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 분야에 집중 투자를 준비하는 출판사도 늘고 있다. 사회과학 출판사로 이름 높은 사계절, 문학 전문 출판사로 빠른 성장을 보인 문학동네, 그리고 일찍부터 이 분야와 인연을 맺어온 두산동아·웅진·창작과비평사·시공사·민음사 등이 최근 들어 부쩍 이 방면 작업을 강화하거나 본격 진출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지난해‘글자 없는 그림책’ 시리즈를 계기로 수입서 번역에서 국내 창작물 출판 쪽으로 눈을 돌린 사계절은 업계 안팎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들 대형 출판사들에 대해 관련 업계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림책다운 그림책이 없던 시절, 이들 출판사가 수입해 번역 출판한 외국 그림책은 그림책에 대한 국내 독자의 ‘눈높이’를 끌어올리는 데 적지 않게 공헌했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이같은 출판 관행이 앞으로도 대세를 이룰 경우 모처럼 마련된 ‘창작 풍토’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반응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현재 어린이책 전문 출판계가 안고 있는 최대 고민은 어린이 그림책을 전문으로 하는 ‘전업 작가’가 태부족하다는 데 있다. 아무리 창작물을 위주로 하고 싶어도 마땅한 작품, 특히 ‘글’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어린이 그림책 문화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그림책을 객관적인 처지에서 평가할 본격 비평가 집단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어린이 그림책 시장의 혁명은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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