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조선 말 사상가 최한기 연구 활발
  • 박성준 기자 (snypsisapress.como.kr)
  • 승인 1999.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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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개화 사상 징검다리 역할… 소장 학자 연구로 사상·생애 드러나
‘진역(震域) 저술상 최고 기록을 남긴 대저술가’(육당 최남선),‘실학과 개화 사상의 가교자’(이우성), ‘우리나라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처음으로 온전하게 전해준 인물’(박성래), ‘경학의 주석 체계라는 방법론을 완전히 이탈해 기학(氣學)이라는 독창적 사유 체계를 전개한 사상가’(도올 김용옥)….

조선 말기의 사상가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1803~1877)에게는 늘 이같은 화려한 수사가 따라다녔다. 그런데도 그는 근 백년간 ‘잊힌 인물’로 남아 있었다. 그런 혜강의 생애와 사상 체계가 최근 신진·소장 연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그 구체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지난 3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원장 한상진) 편수연구원 권오영씨가 단행본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최한기의 학문과 사상〉(집문당)을 펴낸 것을 필두로, ‘혜강 박사’들이 최근 잇달아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토해내고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정문연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혜강이라는 준봉(峻峰)에 도전한 ‘혜강 등반대’의 최근 활약은 눈부시다.

정문연은 6년 전 원효·지눌·퇴계·율곡·다산 등 한국 사상사의 ‘6대 봉우리’를 선정해 그때마다 다른 팀으로 ‘정상 공격’을 시도해 왔다. 권오영 박사말고도 손병욱(경상대·윤리교육과)·신원봉(청주대 강사)·최진덕(정문연)·한형조(정문연) 교수 등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이번의 ‘혜강 공격조’가 구성된 때는 지난해 이맘때다. 이들은 지난 4월 1차 등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무사히 하산했다. 같은 달 문화관광부가 혜강을 ‘문화 인물’로 선정한 것을 계기로, 이들은‘혜강 최한기의 사상과 의미’라는 주제로 학술 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곧이어 후속타로 내부 발표회(5월25일)를 통해 등반 결과를 보고하고, 오는 8월 이를 보완해 단행본으로 묶어내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한기에 대해 잘못 알려진 몇 가지 사실

공동 작업과는 별개로 혜강 고지를 향한 단독 등반 시도도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92년 〈혜강 최한기의 사회사상 연구〉를 박사 학위 논문으로 낸 황경숙씨(성신여대)가 대표적이다. 93년 혜강의 책 〈신기천험(身氣踐驗)〉을 중심으로 혜강 사상을 분석하여 학위 논문 〈기학의 성립과 체계에 관한 연구-서양 근대 과학의 유입과 조선 후기 유학의 변용〉을 완성했던 이현구씨(성균관대)도 정문연 팀에서는 빠졌지만 학계에서 또 다른‘고수’로 꼽히는 소장 연구자이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혜강의 생애·사회적 위치·사승(師承) 관계·가계·학문 방법론·사상사적 가치 등 ‘혜강학’의 대강이 차츰 본 모습을 드러내며 전환기를 맞고 있다.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연구 분야는 바로 혜강 연구의 밑그림이라 할 생애·사회적 처지와 ‘학문적 소속’ 관련 부분이다.

혜강의 생애는 자료 빈곤으로 인해 80년대까지만 해도 오리무중 상태이다가, 90년 원로 국학자 이우성에 의해 <혜강최공전(惠岡崔公傳)>이라는 문건이 입수됨으로써 비로소 드러났다. 91년 이우성은 이 짧은 글을 토대로‘최한기의 사회적 처지와 서울 생활’이라는 짤막한 연구 논문을 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은 ‘혜강이 한미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서, 평생을 한양에 살며 책을 수집하고 저술에만 몰두했다’는 것이다. 혜강의 출신 배경을 따질 때‘한미한 양반 가문 출신’이라거나, ‘반외의 인물’ 또는 ‘신분은 양반이었지만 실제로는 중인 계급’이라는 주장은 이때부터 정설(定說)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학계의 이같은 논의는 최근 새로 발굴된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 성과에 의해 대대적으로 수정·보완되어야 할 상황을 맞았다. 혜강의 아들이 쓴 〈여현산소묘지명(礪峴山所墓誌銘)〉(최명재씨 소장), 혜강 자신이 서문·기문·제문·자설 등을 엮어 펴낸 〈횡결〉 외에 〈승순사무(承順事務)〉 〈향약추인(鄕約抽人)〉 〈재교(財敎)〉 등 이제까지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혜강 관련 저작들이 무더기로 발굴되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전문 연구가들이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혜강은 결코 한미한 양반 가문 또는 중인 계급 출신이 아니라 ‘증조부 때부터 내리 3대를 무과 급제하고, 아들도 문과에 급제한 당당한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또 별다른 사승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던 혜강은, 실제로 초창기에는 당시 개성의 대학자인 김헌기와 외조부 한경리 등을 통해 전통 학문의 맥을 이어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그는 결코 한평생 서울에 살며 저술 작업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고향 개성에 돌아가 살다 묻혔으며 △1840년대 당시 세도가인 조인영·홍석주의 출사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고 △1860∼1870년대에는 조두순(1860년대 좌의정)·정기원 등 권력 핵심부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등, 조선 사회 지배층과 일정한 연결 고리를 갖고 사회적 활동을 펼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혜강은 만년으로 갈수록 현실 참여 의식이 강해졌다. 단적인 예가 혜강이 1871년 신미양요 때 흥선 대원군측의 국방 자문 요청에 응했던 사실이다. 혜강 연구가인 권오영씨는 “당시 그는 69세로 병중이었으나, 영중에서 자문에 응하는 것보다는 서울에서 수시로 상황 보고를 받으며 자문에 응하겠다고 밝히는 등 현실 문제에 적극 대처했다”라고 말한다.
“한국 철학사의 물줄기 틀어 놓아”

학계 일각에서는 지금까지 잔반 또는 몰락한 양반 출신이라는 학설을 그의 사상에 연결해, 혜강학의 독창성에 대해 ‘전통 양반 사회와의 신분적·사회적 단절’에서 그 단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어 왔다. 그러나 혜강 생애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는 혜강 학문의 독창성이 출신 배경에 의해서라기보다, 전통과 절연하려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아울러 혜강의 사상사적 특징과 위치를 확인해 재평가하려는 작업도 점점 깊이를 더해 가고 있다. 이제까지 혜강은 〈성기운화(星氣運化)〉(1867년) 〈추측록(推測錄)〉(1836년) 〈지구전요(地球典要)〉(1857년) 등 일련의 저술을 통해 지구 자전·공전설, 케플러의 3법칙, 서양 역법, 대기의 굴절 현상 등 서양 과학의 성과를 소개한 덕분에, 주로 과학사(또는 과학사상사)적 위치만 중시되어 왔다.

그의 사상사적 중요성이 본격 부각된 때는 90년대 초반.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가 〈독기학설(讀氣學說)〉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단절’이라는 개념을 통해, 혜강 사상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하면서부터이다. 이전까지 혜강 사상 연구는 주로‘경험주의’ ‘근대성’ ‘실학과의 연관성’을 찾는 데 주안점을 두어왔다.
실제로 혜강은 <인정> <기학> 등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중고지학(中固之學;주로 주자학의 형이상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실학파와 유사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음양학이나 성리학을 지목하여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혜강은 또 ‘붙잡을 수 있는 유형의 것, 중험할 수 있게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 바로 실학’이라며 자신의 기학(氣學)을 실학과 일치시키기도 했다.

정문연 학술대회를 통해 발표된 ‘조선 유학사에서의 혜강 철학의 좌표’(한형조) ‘혜강 기학의 이중성’(최진덕) 등은 각자 다양한 시각차를 보이면서 바로 이같은 문제군에 접근해 간 논문들이다. 특히 한형조 교수의 경우 기존 혜강 연구가 지나치게 혜강의 학문 세계 내부를 들여다보는 데 급급해 현장성과 맥락을 놓쳐왔다고 반성한다. 이같은 반성의 토대 위에서 한교수가 강조한 것은 ‘혜강 사상의 혁신성’이다. 한교수에 따르면, 혜강은 도덕적 이념(인·의·예·지)으로 우주를 해석한 기존 주자학의 전통적 학문 방법론에 반기를 들어, 자연과 우주를 ‘경험적으로’ 재편했다는 것이다.

혜강이 이같은 경험론적 세계관을 밀고 나갈 때 ‘서양의 과학’이 중요한 도구 노릇을 했다는 것이 바로 한교수의 설명이다. 한교수는 “혜강과 동시대 사상가인 다산 (茶山)이 ‘경학(經學)’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는 중간점에 서 있었다면, 혜강은 ‘기학(氣學)’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더 밀고 나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함으로써, 한국 철학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틀어 놓았다”라고 설명한다. 혜강 사상의 독창성 또는 위대함은 바로 이같은 ‘혁신성’에 있다는 것이다.

혜강학의 뒤늦은 개화(開花)는 최근 들어와 구미 중심의 근대 과학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서양의 충격’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전통과 근대의 행복한 화해를 추구했던 혜강에게서 근대 과학의 한계를 극복할 탈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학계는 믿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혜강 연구가 오랫동안 답보 상태에 놓이게 된 까닭은, 혜강이 구사하고 있는 기(氣)의 포괄성·‘신기(神氣)’ ‘추측(推測)’ 등 용어의 복잡다기함과 개념 해독의 혼란함 등이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울러 혜강이 당대 사상의 지배적 흐름에서 지나치게 앞서 나가 아예 논쟁 마당에서 사라지게 된 것도 혜강과 현대가 단절하게 된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고 학계는 풀이한다. 결국 한국 사상사의 또 다른 준봉에 대한 정상 공격을 제대로 하려면 ‘산 자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공격 루트’를 복원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혜강 연구는 이제 막 정찰을 끝내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정상 공격을 준비 중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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