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암 투병 이윤림 시인의 첫 시집 <생일>
  • 이문재 기자 (moon@sisapress.com)
  • 승인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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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과 투병하는 이윤림씨, 첫 시집 <생일> 발표
일찍이 모든 시집은 유고 시집이라고 말한 이는, 시인 장정일이었다. 시인은 시집을 통해 자신의 시와 결별하기 때문이다. 시집은 ‘독자의 바다’ 혹은 문학사 속에서 시간과 싸우며 저 혼자 생존해야 한다. 최근 문학동네가 펴낸 이윤림씨(42)의 첫 시집 <생일>은 실제로 유고 시집이 될 뻔했다. 암과 투병하며 엮어낸 시집인 것이다.

이씨는 지난 6월 초, 통증 신경을 끊는 수술을 하고 퇴원해, 경기도 일산 자택에 머무르고 있다. 시인은 숙명적으로 아픈 존재라고 할 때, 이때의 아픔은 관념이거나 추상이다. 그리하여 많은 시인들은 온갖 상상력과 수사학을 동원해, 아픔의 미학을 완성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로 매우 아픈 이윤림 시인은 자신의 시 속에서 아픔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싸움이 치열하면 할수록, 싸움에 임하는 자는 냉정해지고 지극해진다. 하물며 그 싸움이 생명을 담보로 한, 죽음의 입구에서 치러지는 싸움임에랴. 병에 몸을 맡기고, 몸에서 이미 몸의 부재를 예감하는 그의 시는, 시집에 발문을 쓴 소설가 고종석씨가 간파했듯이 ‘사랑이 실려 있어서 훈훈하고, 진실을 우회하지 않아서 오싹하다’.

‘맛없는 인생을 차려놓은 식탁에/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흙에서 왔으니/흙으로 돌아가리라.’ 시집을 열면 처음 만나게 되는 시 <생일> 전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맛이 없는’ 삶이 아니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명석하고 차분했으며, 이지적이면서도 밝은 성격이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씨와 절친했던 황인숙 시인에 따르면, 이씨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가톨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원을 마친 다음 곧바로 교단에 서, 20년 가까이 중학교 국어 교사로 재직했다. 시쓰기와 학생들 가르치기에 관한 한 그의 삶은 결코 ‘맛없는 인생’이 아니었다.

시인은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지만’ 독자들은 시인이 ‘차려놓은 식탁’인 시집 주위로 몰려들고 있다. 그 식탁은 먼지의 이미지로 풍성하다. 시인이 보기에, 먼지는 먼지가 아닌 존재에게 사소해 보이지만, 먼지 자신은 무궁무진한 고통을 지니고 있다(<먼지 서시>). 먼지를 가벼움의 은유라고 파악하는 시선은 오만한 인간 중심주의의 눈길인 것이다.

모든 생명에게 생일은 곧 죽음이 함께 시작되는 날이다. 하지만 삶을 욕망과 동일시하는 이 천박한 세상은 수시로 죽음을 배제한다. 이씨의 첫 시집은 살아가야 할 날들의 끝에 죽음을 설정하지 않으려 하는 삶들에게 죽음과 부재의 시학을 들려준다. <생일>은 ‘이제 나는 나를 낳아야 해요/자가수정하는 꽃같이’라고 노래했던 시인이 낳은 ‘나’다. ‘꽃’이기도 한 그 ‘나’가 지금 막 태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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