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한국 좌파’ 아직 살아 있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9.04.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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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평론> 발간 모임 심포지엄… 학자·노동운동가·시민운동가 한자리에 모여
4월17일 열린 <진보 평론> 발간 모임 발족 기념 심포지엄은, 진보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지난 2월 발기인 모임을 가진 <진보 평론>은 80년대 <현실과 과학>, 90년 <이론>의 맥을 잇고 있으며, ‘계급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분석과 해결을 추구하는 좌파 정론지’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축사를 맡은 김진균 교수(서울대·사회학)는 “단순한 신념과 이념에 따라 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경험이 부족하다. 그 길을 찾는 것이 진보일 것이다”라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를 역설했다.

학자· 노동운동가·시민운동가 등 다양한 참가자들이 참석한 이 날 심포지엄에서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보인 이는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이종회씨다. 오늘날의 시민사회운동을 개괄하는 발제자로 나선 이씨는 ‘자본주의 아래서 시민 사회는 자발적으로 지배에 동의하는 메커니즘의 일부이며, 스스로 지배의 참호가 되고 있다’라고 시민운동의 한계를 지적했다.

토론자로 나선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답게 이에 대한 방어와 변론에 나섰다. 시민운동이 보수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민운동 안에서 진보적 헤게모니를 확장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조교수는 구좌파적 문제 의식의 ‘개방적 심화’와, 신좌파의 ‘진보적 심화’를 과제로 내걸었다.

“구체적 실천 방향 모호하다” 비판도 나와

이른바 전투적 노동운동과 진보적 시민운동이 길항 관계가 된 상황에 대한 지적도 흥미로웠다. 이 문제를 제기한 이는 현장운동가 박장근씨다. 다시 ‘변호’에 나선 조희연 교수는 ‘민중운동 시대는 가고 시민운동 시대가 왔다’는 보수 언론의 호들갑 속에서 시민운동 진영이 반사 이익을 누린 것이 사실이지만, 노동운동이 일반 민주주의 과제를 등한히한 책임도 있다고 반박했다.

좌파 이론가들도 비판 도마에 올랐다. 박장근씨는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한 뒤 ‘구좌파적인 틀로는 안된다’ ‘사민주의적인 신사회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나온 지 오래인데도, 진보 이론 진영이 이렇다 할 틀을 내놓지 못했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국의 소수자 운동을 개괄한 윤수정 교수(전남대·사회학)는 ‘마르크스주의 확장’에 힘을 실었다. 윤교수는 국가에 대항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그와 비슷하게 권력화하는 운동이 아니라, 대중의 역동성에 기초한 운동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아우토노미아(자기 조직화) 사상을 소개했다. 저항과 전복은 꼭 지배 질서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질서가 힘을 못 쓰게 하는 다른 방식을 찾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운동 진영에 대한 비판을 완곡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권력 장악이라는 관점에서 운동과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 갈 위험이 있다. 이질적인 흐름이 생김으로써 기존 지형이 넓어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날 총회에서는 발족 선언문이 채택되지 못하는 촌극이 있었다. 선언문 초안이 모임의 문제 의식을 명확히 담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서관모 교수(충북대·사회학)는 “함께 모여 잘해 보자는 결의만 있을 뿐 구체적인 방향과 노선을 알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운동 등 ‘구 좌파적’ 쟁점만 언급되어 있고 △(이론과 실천이 통합되는 장이라는 주장과 달리) 주체가 진보적 연구자로 한정되어 있으며 △ 자본주의 극복 방안에 대한 쟁점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발족 선언문을 수정해 채택하기로 결정했지만, <진보 평론> 참여자들의 비균질적인 문제 의식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진보 평론> 첫 호는 8월에 발간되며, 창간호 특집 주제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늘과 내일’이다. 편집위원만 44명에 이르러 진보 진영의 목소리를 폭넓게 담아내겠다는 의지를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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