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사회학 새 물결, 일상성 연구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9.05.2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랑스 유학파 사회학자들 주축, 일상 문화 연구 활발… 대중의 삶 분석해 의미 부여
술이 없는 한국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슬픈 일이 있어도 술, 즐거운 일이 있어도 술을 권한다. 농촌에서 막걸리는 ‘필수 음료수’이며, 도시의 임금 노동자들에게 소주와 맥주는 일의 고단함을 풀어주는 ‘피로 해소제’이다.

술이 야기하는 그 많은 부작용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술은 ‘신이 내린 선물’ 대접을 톡톡히 받으며 끊임없이 ‘자리’를 만들어 낸다. ‘술자리’는 한국 사회의 가장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그 오랜 세월 술을 마셔 왔으면서도 우리는 술을 왜 마시는지, 술 자체가 인간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가며 마시지 않는다. 술 마시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것 같은 (그러나 사실은 잘 모른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기존 분석틀로는 현실 제대로 못 본다”

얼마 전에 출판된 <술의 사회학>(한울아카데미)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온 ‘술 문화 보고서’이다. 그동안 술에 관한 학술 연구가 알코올 중독에 집중해 왔던 데 비해, 박재환 교수(부산대·사회학)와 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가 펴낸 이 책은 술을 둘러싼 문화와 환경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연구 보고서이다. 여기에는 ‘사람들은 술을 왜 마시는가’ ‘한국 사회에서 술과 술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술로 인한 부작용은 어떤 것인가’ 따위 내용이 담겨 있다.

한국 사회 구성원 가운데 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술 문화에 젖어 있다. 내가 마시든 남이 마시든 ‘술자리’라는 곳에서 빚어지고 결정되는 일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술을 비롯해, 흔하디 흔해 진부하기까지 한 일상성·일상 생활이 몇년 전부터 사회학적 분석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연구의 특징은 보통 사람들의 가장 평범한 삶과, 그 삶을 구성하는 일상들을 잘게 쪼개 분석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거대한 역사가 개별 삶들의 집적물이라면, 그 삶들은 개개인의 일상 생활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을 파악하는 것은 당대의 사회를 읽고 분석하는 일이다.

한국에서 일상·일상성이 사회학 연구의 한 분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부터이다. 80년대 내내 사회과학계를 달구었던 것은 사회구성체 논쟁 같은 거대한 담론들이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해 거대 담론이 뒤로 물러나자 그 자리는 ‘포스트 증후군’으로 채워졌다.

일상성 연구자들은 거대 담론도, 포스트 증후군도 현실과는 별 관계가 없는 이론적이고 도식적인 현상이자 유행이라고 파악한다. 구체적 현실과 긴밀한 소통 없이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논쟁과 이론으로는 대중의 삶과 생활을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학자·인류학자 들이 주축이 된 일상성 연구자들은 사회를 읽고 해석하는 기존 사회학적 방법론에 이의를 제기한다. ‘실증주의 사회학’ ‘구조주의 사회학’ ‘마르크스주의 사회학’ 등 지금까지의 주류 사회학은 거창한 ‘사건’이나 ‘구조’에 관심을 집중했다. 사건과 구조에 대한 이해가 특정 사회를 분석하는 ‘필요 조건’임에는 분명하지만, 한 사회에 대한 설명이 ‘조건’에 대한 논의만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회학적 논의는 구조적 조건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객관성과 과학성을 보장하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한다. 반면 일상성 연구자들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분석 대상은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과 삶’이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실로 어느 누구가 넘쳐나는 현실과 삶의 모습을 이론의 투망으로 건져낼 수 있다고 장담할 것인가. 현실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 표상을 정교하게 포착하고 있는 동안 그 현실은 벌써 달라지고 있다.’

‘매일 되풀이되는 삶’, 곧 일상을 제대로 보는 것은 사회학적 연구를 넘어 한 사회를 가장 빨리 읽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외국에 나가서 그 사회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장 같은 곳은 한 사회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현장이다.” 일상문화연구회에 소속되어 있는 현택수 교수(고려대·사회학)의 말이다.일상문화연구회, 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 주도

90년대 초부터 일상성 분석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온 연구회는 2개이다. 일상문화연구회와 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가 그것인데, 두 연구회 모두 프랑스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한 연구자들이 주축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일상문화연구회는 정수복 크리스챤아카데미 연구실장, 이병혁(서울시립대)·김무경(서강대)·이영자(가톨릭대)·현택수 교수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는 부산대 사회학과를 중심으로 결성된 연구회이다. 부산대 연구회를 이끄는 이는 역시 프랑스에서 공부한 박재환 교수이다.

미셸 마페졸리 등 권위 있는 일상성 연구자들에게서 배운 한국 연구자들은 그곳에서 익힌 사회학적 관점과 분석틀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공동 연구의 성과로 나온 책들이 <한국인의 일상 문화>(96년) <일상 속의 한국 문화>(98년·일상문화연구회 편), <일상 생활의 사회학>(94년) <술의 사회학>(99년·박재환/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 편)이다.

<술의 사회학>을 펴낸 일상성·일상생활연구회는 술을 구체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한 사회의 특성이 노동과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규명될 수 있다면 술에 대한 분석은 그 사회의 실존적 상황을 밝혀주는 가장 전략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화장·자동차 등 대상 다양… 글쓰기도 색달라

여기에서 출발해 ‘술과 음주는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오랜 매체인 동시에 그 자체가 강력한 형식의 커뮤니케이션이며 의례이다’ ‘청산해야 할 음주 문화 때문에 오늘날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주도의 문제가 아니라 일상의 생활 문화 전체가 병들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와 같은 결론을 얻어낸다. 보통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마시는 술과 술 문화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해명해 놓은 것이다.

일상문화연구회의 일상성 분석은 각 분야에 골고루 퍼져 있다. <한국인의 일상 문화>는 한국인의 만남·모임·의식, 욕망·믿음·사고방식, 말·옷·먹거리를, 지난해에 나온 <일상 속의 한국문화>는 주거와 여가 문화를 집중 분석했다.

<화장, 미의 추구>라는 글에서 부정남 교수(성신여대·사회학)는 ‘여성은 왜 화장을 하는가’ ‘한국 여성들의 화장 내력’ ‘화장에 담긴 문화 외국주의’를 , 현택수 교수는 한국의 자동차 문화에서 연령·성차별, 주차 전쟁을 통한 공동체 의식의 실종을 읽어내기도 했다.

일상성 연구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너무나 사소하고 시시콜콜해, 무의미하고 가치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인간의 활동 자체가 구체적인 문화이며, 그 문화 하나하나에 정체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데까지 나아가 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지하철 문화, 이를테면 서울 지하철에는 눈을 감은 사람과 스포츠 신문을 읽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 들이 연구자에 의해 발견되고 해석되는 것이다.

일상성 연구는 대중의 삶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글 쓰기에도 색다른 방식을 택했다. ‘당대 대중에게 읽히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서, 논문도 수필도 아닌 제3의 양식을 실험하는 중이다. 일상성 연구에는 어렵고 생경한 학술·전문 용어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이라는 주어가 등장하고 글쓴 이들의 감정과 직관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일상문화연구회 회장인 이병혁 교수는 일상성을 연구하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사회학은 결국 현재에 대한 관심이다. 우리는 통계적 분석 같은 인위적인 것보다는 삶 속 참여자이면서 관찰자로서 구체적·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일상적인 용어로 분석하려 한다.”

넓고 깊어지는 일상성·일상 문화 연구의 의미는 작지 않다. 게으름을 포함한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문화 활동이며, 모두 의미가 있음을 밝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일상성 연구는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닌 ‘삶을 위한 학문’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