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국제정치학 연구자들, ‘19세기 돌아보자’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9.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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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연구 통해 ‘탈근대’ 위한 새 전략 모색
구미의 최신 이론 세례를 받은 일단의 국제정치학 연구자들이 뜬금 없이 19세기 개화기 연구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서울대 하영선·장인성 교수, 고려대 김석근(철학)·안인회 박사, 성신여대 김용직·김영호 교수 들을 1진으로 하고, 이들 교수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거나 수련을 쌓는 젊은 연구자 집단을 2진으로 하는 사회과학자들이 ‘21세기 준비는 19세기 삶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 달렸다’며 ‘19세기 읽기’에 연구열을 불태우는 것이다. 이들은 전통과 근대가 혼재되어 갈등했던 개화기 경험을 과학의 눈으로 면밀하게 살피지 않고서는 탈근대 사회를 위해 국제정치학이 이바지할 바가 극히 적다고 주장한다.

유길준·박영효 제대로 읽기

통일연구원 김수암씨가 이들의 대표 격이다. 이 기관 소속 북한인권센터 책임연구원인 김씨는 7년째 별난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서울대 외교학과에 적을 두고서 ‘조선 근대 외교 제도’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올해 심사 통과를 목표로 막바지 논문 집필 작업에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

〈박영효(朴泳孝)의 근대 국가 구상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올해 초 박사 학위를 받은 김현철 박사도 비슷하다. 김수암씨의 대학 선배이기도 한 김박사의 89년 석사 학위 논문 주제는 특히 80년대 운동권을 풍미한 역사학자 E.H. 카의 ‘정치적 현실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김박사는 ‘개화파 전문가’가 되었다.

김박사가 국제 정치 또는 정치학의‘정통 주제’를 벗어나, 학계에서 별로 빛도 나지 않는 한국 개화기 연구에 몰두하게 된 데에는 모교인 서울대 외교학과의 학풍과, 지도 교수인 하영선 교수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전파(傳播)학회’라는 우산 아래 비교적 조용하게 연구를 진행해온 이들의 움직임은 서울대 외교학과, 특히 하영선 교수를 진원지로 한다. 국제정치학자답게 군축·핵·국제 분쟁·평화 문제 권위자로서 탈근대주의(포스트모더니즘) 좌표를 설정하는 작업에 매달리던 하교수가 남들이 가기 꺼리는 ‘복고주의자의 길’로 접어든 때는 10여 년 전. 그는 냉전과 탈냉전의 갈림길에서 전통·근대·탈근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당시 한국 사회 현실을 보며 그때까지 자신의 학문 태도를 근본적으로 회의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21세기를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전통과 근대의 복합화가 시작된 19세기를 정확히 읽어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교수는 국제정치(또는 한국정치)를 ‘전파와 수용’이라는 시각으로 정리한 국제정치학계의 원로 이용희 교수(작고)로부터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었다. 하교수가 주도해 소장 학자들이 모여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19세기 읽기에 나선 ‘전파학회’도 바로 이교수의 방법론을 따른다는 의미로 이름 붙인 것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이들의 노력은 정용화 박사(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지난해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유길준(兪吉濬)의 정치 사상 연구〉를 내놓음으로써 세상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세기 정치가이자 〈서유견문〉 저자로 잘 알려진 유길준은 기존 학계, 특히 사학계에서는 비교적 연구 결과가 많은 편이다. 문제는 기존 학계가 ‘유감스럽게도 유길준을 지나치게 부정하거나 적극 수용하는 양 극단의 입장을 보여왔다’는 것이다. 하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유길준을 이런 식으로 재단할 경우, 근대를 기반으로 전통을 적극 품으려 했던 유길준의 노력이 지나치게 단순 처리되어 개화파의 전체상을 놓칠 공산이 컸다’. 정용화 박사의 논문은 바로 이같은 점을 보완하면서 유길준에 대한 해석상의 새로움을 제공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국내외를 통틀어 단행본급 연구 성과로는 처음 나온 김현철 박사의 〈박영효…〉도 〈유길준…〉과 ‘문제 의식’을 같이한다. 기존 학계는 박영효가 개화파 거두로서 개화기 특히 갑신정변을 전후로 한 국제 정치판에서 매우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했던 ‘연구 대상’임에도, 1907년 일본 망명에서 돌아온 이후 보인 친일 행적 탓에 본격 분석을 꺼려온 것이 사실이다. 김박사는 바로 이같은 선행 연구의 빈곤을 뒤집어 박영효 연구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김박사가 얻은 결론은 ‘당대 국제 관계 측면에서, 오늘날의 세력 균형 이론에 해당하는 균세(均勢)를 적극 활용해 조선의 자주 독립을 시도했던 박영효의 근대 국가 구상을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당시 개화파 정치인(또는 외교관)들의 노력은 비록 실패와 좌절로 끝나기는 했지만, 나름으로 오늘날의 그것 뺨치는 ‘근대 개념’을 머리 속에 그리며 격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고자 했으며, 이같은 경험은 동북아 국제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적 상황을 판단하는 데에도 유효한 참고 자료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 재해석’에 대한 이같은 입장은 국제 질서의 규율 원리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전통 관념으로부터 ‘주권 국가간 실력 대결’이라는 근대 관념으로 넘어가는 시기, 구체적으로 19세기 조선의 외교 제도사를 추적해온 김수암씨 연구 내용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김씨는 “외교 부서와 상주 사절 제도를 중심으로 근대 외교사를 보았다. 연구를 통해 상호 이질적인 국제 질서관이 긴장·갈등 관계를 형성하며 상호 변모해 간 역사 과정을 살필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김씨의 설명에 따르면, 1876년 조·일 수호조약 체결에서 시작해 조선이 최초로 상주 사절을 외국에 파견하는 1887년까지 약 10년 간은 조선 외교가 열강의 세력 다툼 틈바구니에서 일방적으로 외래 제도가 이식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시기로 파악된다.

이 ‘전파상’들이 당면한 과제는 크게 두 가지. ‘1차 문헌 해독 능력 등 체계적인 훈련 없이 엉뚱하게 남의 영역을 넘본다’는 관련 학계 외부의 편견과, ‘시대가 어느 때인데 과거를 붙잡고 늘어지는가’ 하는 학계 내부의 몰이해를 실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자기 목표를 갖고, 그것도 남들이 꺼리는 방향으로 꿋꿋이 걸어가는 이들 전파상의 모습은 ‘학문 사대주의’에 젖어 있는 기존 사회과학계에 청신한 자극제가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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