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 된 한국 영화 관객 싹쓸이 심상찮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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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연휴에 몰아친 혹한도 한국 영화의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실미도>(연출 강우석)는 가뿐히 관객 7백만명을 넘어서 <친구>의 기록 8백20만명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친구>가 52일 만에 달성한 7백만 명 고지를 <실미도>는 한 달 만에 돌파한 셈이어서 전망이 밝다.

지난 1월16일 개봉한 <말죽거리 잔혹사> (연출 유 하)는 새로 가세한 주자답게 가장 선전했다. 개봉 첫 주말에 <실미도>의 기세를 누르며 기염을 토한 데다, 이미 영화를 본 30~40대 관객이 확실하게 입소문을 내기 시작하면서 더욱 탄력이 붙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영화 두 편이 치열한 샅바 싸움을 하면서도 동반 상승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 영화의 관객 싹쓸이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국 영화끼리 샅바 싸움

16일 함께 개봉한 한국 영화 <내 사랑 싸가지>와 산악 멜로 <빙우>가 그 뒤를 바짝 좇고 있는 상태여서 명절 대목은 말 그대로 한국 영화 판이었다. 가장 피를 본 것은 할리우드 직배 영화 <페이 첵>이었다. 원작자와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전혀 맥을 추지 못했다. 다른 직배 영화인 <피터 팬> <브라더 베어>도 5, 6위로 주저앉아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다.

이 잔치는 2월6일 초대형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연출 강제규)가 가세하면 대형 한국 영화 세 편이 맞붙는 대회전으로 비화할 조짐이다. 강제규 감독이 제작비 1백48억원을 쏟아부은 이 작품은 화려한 캐스트와 볼거리로 <쉬리>에 이어 두 번째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벼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한 주 앞서서 <안녕 UFO> <그녀를 믿지 마세요> <그녀를 모르면 간첩> 등 한국 영화 세 편이 나란히 개봉한다.이처럼 연말과 연초에 한국 영화가 보따리를 풀면서 최대 성수기가 여름에서 겨울로 옮겨간 것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처음에는 할리우드 직배 영화의 위세가 센 여름을 피한다는 취지였는데, 이제는 한국 영화가 활약하는 겨울이 아예 최대 성수기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2001년부터 시작된 새로운 흐름이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2003년 한국 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49.7%(서울 기준). 전국 기준으로 볼 때 한국 영화가 평균 4% 가량 높으므로 2002년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점유율 50%시대가 정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한 편이 동원하는 관객 수를 비교하면 한국 영화가 이미 골리앗이 되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상영 편수는 한국 영화가 외화에 비해 크게 뒤지기 때문이다. 2003년 개봉한 한국 영화는 65편이고 외화는 1백75편. 결국 한국 영화 1편은 평균 32만2천명을 동원했고, 외화는 12만명에 머무른 셈이다. 게다가 지난해 외화 관객은 절대 수치가 줄었다. 그런데도 전체 관객 수는 전년에 비해 10% 가량 늘었다. 한국 영화 관객이 20% 이상 늘면서 시장 확대를 주도한 것이다.

한국 영화의 눈덩이 효과는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일까.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기본이지만 마케팅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한국 영화 제작비는 3배 남짓 상승했는데, 유독 마케팅 비용만은 11배 이상 늘었다. 2002년 평균 순제작비가 24억원인 데 비해 마케팅 비용은 그 절반에 육박하는 12억원이다.
‘크게 지르고, 팍팍 알리는’ 이 추세는 당분간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올해 대표적인 대작 영화가 될 <태극기 휘날리며>는 부산에 영화에 쓰인 소품을 전시하는 전시관을 마련했는데, 그 행사 하나에만 24억원을 쏟아부었을 정도이다.

비용을 들인 것은 홍보뿐이 아니다. 한국 영화 홍보에는 방송사의 영화 관련 프로는 물론 연예 프로그램까지 가세해 효과를 톡톡히 누린다. 방송사로서는 스타들이 출연함으로써 시청률을 확보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시스템이 정착된 것이다. 한국 영화가 선전하는 데는, 걸어다니는 홍보판이나 마찬가지인 영화 배우들이 직접 홍보에 나설 수 있는 시스템도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영화 점유율이 50%를 넘어서고 편당 관객 수가 외화의 3배에 육박하면서 판을 다시 짜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즉 제작사나 투자사 몫이 더 커져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것이다. 통상 외화는 5 대 5이지만 한국 영화는 극장이 60%를 가져가고 나머지 40%를 놓고 다시 제작사와 투자사가 수입을 나누어 갖는 형태이다. 과거 극장에 스크린 쿼터 준수를 요구하면서 반대 급부로 이 시스템을 만든 탓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 영화 성장의 과실을 ‘유통업자’만 고스란히 따먹는 것이 아니냐는 볼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살인의 추억>을 비롯해 <로드 무비> <지구를 지켜라> 등 문화방송 영화 대상에서 최고 작품상 후보에 오른 다섯 편 가운데 세 편을 제작한 영화사 사이더스가 운영난에 시달리다가 올해 초 경영권을 넘긴 것이 극명한 예다.

시장이 커지면서 각 주체들 사이의 갈등도 표면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통합전산망 사업이다. 통합전산망은 전국의 매표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개해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자는 취지로 올해 1월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극장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지연이 불가피하다.
영화진흥위원회나 문화관광부는 통합전산망에 가입하는 극장에 한해 스크린 쿼터 일수를 경감해주겠다며 당근 겸 채찍을 빼들었다. 하지만 점유율이 50%를 넘어서고 한국 영화 한 편당 관객 동원 수가 외화의 3배에 이르는 현실에서는 스크린 쿼터 제도를 과거처럼 당근이나 채찍으로 활용하기가 어려운 딜레마가 있다. 한국 영화의 선전이 오히려 구조적인 혁신을 가로막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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