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한국 과학사〉 펴낸 전상운 박사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06.2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가 있기 전에는 늘 역사적 사실이 있게 마련이다. 너무 평범해 자칫 잊히기 쉬운 이 진리를 최근 새삼스럽게 상기시켜주는 책이 나왔다. 성신여대 총장을 지낸 원로 과학사가 전상운 박사가 펴낸 〈한국 과학사〉(사이언스북스)가 바로 그것이다.

역사적 사실로만 존재해 오던 한국의 전통 과학·기술은 이 책에 와서야 겨우 ‘자신의 역사’를 가질 발판을 마련했다. 고대의 무쇠 도끼에서부터 해시계·고지도에 이르기까지 각종 과학·기술 변천사가 ‘하늘의 과학’ ‘흙과 불의 과학’ ‘한국의 인쇄 기술’ ‘땅의 과학’ 등 분야 별로 집대성된 것은 사실상 이 책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전박사는 자신의 책에 대해 “다음 세대 학자들에게 어떤 암시를 주거나 연구의 실마리를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말한다.

과학사가로서 전박사의 학문적 생애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피난지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화학을 전공하던 그는 졸업 무렵 서울로 돌아오면서 ‘욕심’을 냈다. ‘화학을 공부해 세계적 학자로 대성하기는 전후 혼란기의 형편 없는 연구 여건에서는 힘들다’고 판단되자 전공을 과학사 쪽으로 과감하게 돌린 것이다.

이후로 전박사가 걸어온 길은, 그대로 과학사라는 낯선 학문의 개척사가 되었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정보로 국내 학자로서는 처음 일본 과학사학회에 가입한 것도 그 중 하나. 국내에서 과학사학회가 만들어진 것은 1960년대 들어서인데, 전박사는 일본과학사학회 회원으로 가입한 덕분에 몇 년 뒤 한국의 전통 과학과 관련된 자신의 첫 논문도 일본 학계에 먼저 발표할 수 있었다. 그는 부족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 당시 국학자로 이름 높았던 홍이섭 선생(전 연세대 교수)을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다.

일찍이 1960년대 영국의 세계적 과학사가 조셉 니담과 학문적 교류를 시작하고, 1974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전통 과학·기술에 관한 영문판 개론서를 미국 MIT에서 펴낼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길이 없으면, 스스로 길을 만들어 걸어간’ 전박사식 연구 열정의 소산이었다.

전통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사가로서 전박사가 한시도 잊지 않았던 점은, 물론 한국 과학 전통의 독창성이다. 하지만 전박사는 섣부른 민족주의를 내세우기보다는 냉정하고 철저한 학문적 고증을 앞세우는 데 주력했다. 학문적 고증이 빠진 전통 과학의 독창성은 공허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고증 통한 ‘우수성’ 해명에 주력

전박사가 당시 아시아재단이 보태준 천 달러와 자신의 집을 팔아서 장만한 천 달러를 들고 1969년 미국에 건너간 까닭도 ‘저들의 용어’와 ‘저들의 방법론’을 배워 한국 전통 과학의 독창성을 설명할 능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가 조선 시대 세종조 때의 계측 기술 수준이 세계 최고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이같은 경험에서 나왔다. “자연 현상에 대한 실험적 관찰은 근대 과학이 발전하는 주된 계기를 이루는데, 이같은 실험적 관찰 방법은 흔히 과학 수준이 앞섰다는 서유럽에서도 16세기 들어와서나 가능해졌다”라고 전박사는 말한다.

나일성·송상용·박성래·김용운 교수 등과 함께 한국 과학사학계의 1세대 학자군을 대표하는 전박사는 지난해 서울대 강의를 끝으로 일단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6년 연세대 국학연구원 객원교수 때 펴낸 〈한국 과학사의 새로운 이해>(연세대 출판부)에 이어, 최근 저서를 통해 과학사를 총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40년 동안 줄곧 한길을 걸어왔지만 과학사 분야에 대한 전박사의 애정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른다. “일본 교토 대학 인문과학연구소는 강의 부담 없이 밤낮 연구만 하는 과학사 교수가 50명이 넘는다. 중국 과학사연구원도 연구원이 백명에 이를 정도다. 도처에서 자기 민족의 과학 전통을 돌아보는 일에 열을 올리는데, 국내에서는 전문가 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사람마저 드물다”라고 그는 개탄한다. 과학 전통을 재발견하는 일은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