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한꺼풀씩 신비 벗는 고구려 벽화
  •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0.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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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 전호태 교수 중심으로 동이족 세계관·생활사 새롭게 해석
고구려 고분 벽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고분 벽화를 단순한 예술품, 혹은 중국 고분 벽화의 아류쯤으로 여기던 것이 그동안의 ‘상식’이었다. 이같은 묵은 때를 말끔히 벗겨내고, 민족 문화의 진수인 고구려 고분 벽화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고분 벽화 다시 읽기’가 소장 연구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성과도 적지 않다. 대표 주자로는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의 일인자로 통하는 울산대 전호태 교수를 들 수 있다. 그는 최근 자신의 18년 연구 결과를 집대성해 남북한·중국·일본을 통틀어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기념비적 작품을 내놓았다.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사계절)가 그것이다.

전교수의 이번 책은 1997년 같은 제목으로 나온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을 많이 손질한 것이다. 우선 자료적 가치가 눈에 띈다. 전교수는 그동안 자료에 접근하지 못하는 한계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정보 왜곡을 ‘벽화 연구의 가장 큰 병폐’로 여겨 왔다. 예컨대 북한은 자기네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 명칭을 전면 개정했는데, 단편적인 정보만을 접하기 마련인 국내 연구자들은 이같은 사실도 미처 알지 못해 이름이 바뀐 고분을 다른 고분으로 착각하고 벽화 논의를 진행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 전교수는 이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중국과 북한에 걸쳐 모두 92기에 이르는 고구려 고분의 이름을 일일이 고증하여 ‘일반 명칭’ ‘북한 명칭’ ‘그 외 명칭’으로 나누어 부록편에 담았다.

고구려 고분에 대한 편년표를 새로 제시하고, 전세계에 흩어진 고구려 고분 관련 연구 성과를 저서·논문 별로 망라한 목록 작업 또한 전교수의 업적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항목이다. 이 목록에는 첫 연구가 이루어질 무렵인 20세기 초반 일본 학자들의 문건에서부터 지난해 국내 연구자들이 생산해낸 논문까지 남북한·중국·일본 연구자들의 논저가 15쪽 분량으로 종합 정리되어 있다. 이 목록은 말하자면 목록화한 연구사 연표인 셈이다.

하지만 전교수의 책에서 진짜 주목할 대목은 그가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해 국내외를 막론하고 고분 벽화 연구사에서는 처음으로 ‘고구려인의 내면 세계’를 더듬은 데 있다. 전교수가 시도하기 전까지 허다한 고구려 고분 벽화 연구가 있었지만, 다루는 대상은 주로 미술사적 의의를 밝히는 데 그쳐 왔다.

애초 그의 관심은 연꽃 문양 등 고구려 고분 벽화 일부에서 발견되는 불교적 요소에 주목해 고구려인들의 ‘불교적 내세관’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데 있었다. 하지만 연구가 깊이를 더하면서 전교수는 고구려인의 내세관이 고구려 특유(또는 동이 문화계 특유)의 ‘계세적(繼世的) 내세관’(현세의 삶의 내용이 내세로 그대로 이어진다는 믿음)에서 출발해 오랜 변천 과정을 거치다가 신선 사상과 불교적 내세관(전생·윤회 중심)이 결합한 ‘선(仙)·불(佛) 혼합 내세관’으로 귀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전교수의 논지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고구려 정신 세계의 고유성’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지금까지 고분 벽화의 주요 기제로 쓰였던 미술사적 접근은 물론 정치·사회·종교·사상·민속·복식·천문·과학 등 다방면의 연구 성과와, 중국측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총동원해 ‘고구려 벽화가 중국으로부터의 일방적 유입이 아닌, 고구려인의 정신사적 고유성이 이룩한 창조 또는 재창조 결과물’임을 당당하게 선언했다.

전교수가 파악한 ‘고유성’의 증거는 전기에 해당하는 각저총(중국 집안 소재) 등 초기 ‘생활풍속계 벽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나무 그림’ ‘사나운 개 그림’ 등이다. 이는 대개 동이(東夷) 문화계 민족이 무덤 그림을 그릴 때 자주 등장시키는 소재로, 중국 벽화와는 뚜렷이 대별되는 고구려적 소재라는 것이다. 전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같은 고구려적 요소는 고구려가 불교를 적극적·능동적으로 받아들이던 4세기 말~5세기 중엽에 일시 사라졌다가, 5세기 후반 들어 변형된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후기 고분에서는 계세적 내세관의 연장선에 있는 ‘승선적 내세관’(신선 사상)이 불교적인 ‘전생(轉生)적 내세관’과 융합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동원 가능한 개별 학문 성과를 총동원해 고분 벽화를 종합적으로 연구한 전교수와 달리, 생활사·신화학·천문사상 등 고구려 고분 벽화의 한 국면 또는 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미시적 연구’도 괄목한 만한 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고분 벽화 내용을 토대로 고구려인의 생활사 서술을 처음 시도한 소장 연구자 김용만씨의 책(〈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나〉)도 그 중 하나다. 이보다 앞서 중국 고전 〈산해경〉 내용을 분석해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오는 신화적·도교적 소재들이 ‘일방적으로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동이 문화권 전체가 향유한 공동의 자산으로서 오히려 후대 중국의 신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밝힌 정재서 교수(이화여대·중어중문학)의 논문(〈고구려 고분 벽화의 신화·도교적 제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 1996년)도 학계에 만만치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 도교적 색채는 모두 중국에서 유입되어 왔고, 따라서 고구려 고분 벽화에 담긴 도교적 요소는 당연히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는데, 정교수는 이에 대해 강력한 반증을 제시한 것이다.또 하나의 신천지 ‘고구려 천문 사상’

지난해 〈고대 중국과 한국의 천문 사상 연구〉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받은 김일권 박사(서울대 강사·종교학)의 작업도 주목되는 분야이다. 전호태 교수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고분 벽화 연구 분야에 신천지를 개간해 가고 있는 김박사의 주된 연구 방향은, 고분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천문 관련 그림을 면밀히 분석해 ‘고구려 천문 사상의 전모’를 드러내는 일이다. 김박사는 이미 집중 연구를 통해 △고구려인의 ‘별자리 방위 표지 체계’가 동시대의 중국과는 확실히 다른 독자성을 띠고 있으며 △이같은 표지 체계의 일부가 위·진 시대 중국 땅에 ‘수출된’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김박사는 “고분에 그려진 별자리 그림 가운데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는 비단 고구려 천문 사상뿐만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 천문 사상의 전모를 밝히는 데에도 적지 않게 이바지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한다.

벽화에 대한 접근법이 가지를 뻗어가고 연구 수준 또한 깊어지면서, 미술사·고고학은 물론 역사학·민속학·신화학·고(古)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 역량이 결합하는 이른바 ‘학제간 연구’에 대한 요청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점증하고 있다. 지금처럼 고립·분산해 이루어지는 연구 풍토로는 ‘무궁무진한’ 고구려 고분 벽화의 학문적 쓰임새를 활용하기는커녕 벽화 자체가 가진 ‘특징’을 잡아내기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벌써 학계에서는 전호태 교수를 중심으로 학회 발족 등 연구회를 조직하려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가 광개토대왕 비문 이상으로 가치 있고 살아 있는 역사 자료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소수 연구자들의 선구적인 노력에 힘입어 고구려 고분 벽화의 진가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반가운 일이 최근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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