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드라마<은실이>의 매력 탐구
  • 蘇成玟 기자 ()
  • 승인 1999.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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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 드라마’ 인기 분석/다양한 갈등 구조 돋보여…등장 인물 성격도 눈길
지난 3월23일 방영된 SBS 월·화 드라마 〈은실이〉를 시청한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두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첫 번째는, 극장 기도인 춘식이(정웅인)가 극장주 딸인 영채(강혜정)에게 “난 네가 무서워”라고 털어놓으며 고개를 젓는 신. 두 번째는, 의사인 병국(김창완)이 아내 인숙(권지선)에게 “난 당신이라는 사람이 무서워”라고 내뱉으며 치를 떠는 장면.

춘식이가 영채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계급 갈등’ 때문이다. 고아에 전과자 출신인 춘식은 맹목적으로 사랑을 호소하는 극장주의 딸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영채에게는 춘식이가 달콤한 풋사랑일지 몰라도, 이 사실이 극장주에게 알려지는 순간 춘식은 언제 파면될지 모른다. 게다가 그는 어른 흉내 내기를 좋아하는 열여섯 살 영채를 아이로 대하는 데 점점 더 한계를 느낀다.

사람 사는 냄새 물씬… 갈수록 구조 탄탄

인숙에 대한 병국의 두려움은 ‘윤리적 갈등’에 가깝다.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자신의 바람을 묵살한 채 몰래 낙태 수술을 받은 아내. 그를 향한 병국의 분노는 단순한 배신감을 넘어 그처럼 생명을 경시하는 인물과 함께 살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회의로까지 확대된다. 더구나 인숙은 ‘의사 마누라’가 아닌가.

이 날 <은실이>가 보여준 삶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겪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은실이〉는 그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대단한 사건들’ 속에서 삶을 해부한다.

갈등 없는 드라마가 없지만, 〈은실이〉에 등장하는 갈등은 보기 드물게 다양하다. 장낙도(이경영)와 그의 처 임청옥(원미경)이 불륜의 씨앗으로 태어난 은실이(전혜진)를 사이에 놓고 벌이는 신경전. 극장 주도권을 놓고 실랑이하는 극장주 동생 장낙천(권해효)과 극장 주임 허동만(이재포). 장낙천과 배신자(이주희)의 사랑을 훼방하는 옥자(윤영주)와 두봉(배도환). 준수(이지영)와 길례(김원희) 사이에 끼어든 준수의 옛 애인 미경(황미선)이 이루는 삼각 관계. 모범생 민재(김정우)의 환심을 사려는 유정(이정윤)과 맹순(이나리)의 알력. 어른들의 갈등에서부터 아이들의 작은 갈등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사건이 얽히고 설켜 있다.

그런데도 〈은실이〉가 묘사하는 60년대 초반의 한 가상(假象) 소도시 ‘화산’의 모습은 그다지 복잡하거나 무질서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기는 우리네 이웃 이야기처럼 덤덤하게 보일 뿐이다.

이는 작가 이금림씨가 점묘 화법을 구사하듯 과장되지 않은 손놀림으로 촘촘하게 이야기를 ‘찍어 가기’ 때문이다. 이금림씨는 “나는 드라마틱한 드라마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드라마는 보고 나면 자꾸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한다.

굵직한 사건을 축으로 긴박하게 결말을 향해 치닫는 드라마들이 연역적이라면, 〈은실이〉는 귀납적인 방식으로 삶을 묘사하려 애쓴다. 초반 시청률을 중시하는 한국 방송 드라마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초반보다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 구조가 탄탄해지는 이금림의 드라마는 그래서 돋보인다.창의성 있는 연기가 인기 뒷받침

〈은실이〉의 또 다른 매력은 등장 인물들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선과 악’이라는 도식 속에 놓여 있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극장과 제재소를 경영하는 부자 장낙도이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어린 동생을 키우며 자수 성가한 인물이다.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부자가 되기 위해 일도 열심히 했지만 권모와 술수 역시 마다하지 않았다. 바람을 피워 은실이를 낳고도 기세가 당당하다.

장낙도는 말끝마다 자신의 재력을 과시할 만큼 물질 만능 사고를 갖고 있는 데다, 집권당의 공천을 못 받자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할 만큼 권력을 쫓는다. 또 ‘아버지’라는 이름과 ‘남편’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가족의 욕구 불만을 억누르는 전형적인 가부장이다. 장낙도가 파렴치하거나 몰지각한 인간으로 묘사되기에 충분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극중에서 그의 언행은 인정과 예절을 겸비한 신사의 그것과 비슷하다. 오토바이 사고로 논바닥에 굴러떨어진 동생을 살리려고 울면서 동분 서주하고, 가족에게 ‘미운 오리새끼’처럼 천대받는 은실이가 기 죽지 않도록 노심 초사하며, 국회의원을 꿈꾸는 그의 노력에 일수놀이로 찬물을 끼얹는 장모에게도 극진한 예를 잃지 않는다.

작가 이금림씨는 장낙도의 독특한 성격은 상당 부분 연기자로부터 연유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낙도는 야비한 인간이지만 이경영이 연기하니까 그렇게 그려지지만은 않았다. 점점 더 ‘이경영식 장낙도’가 될 수밖에. 연속극은 마치 생물 같아서 배우 특성에 따라 등장 인물 성격이 변형되기도 한다. 배우와 등장 인물이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다듬어주는 것도 작가가 할 일이다.”

경쟁자인 허동만 주임에게는 냉혈한처럼 가혹하지만, 불쌍한 조카 은실이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삼촌 장낙천. 침착하고 이지적인 품성을 지녔으면서도, ‘시앗’(남편의 첩)의 자식 은실이를 무관심하게 방치하는 장낙도의 아내 임청옥. 모두 다양한 스펙트럼의 성격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연기자들의 활약 역시 크다. <은실이〉 등장 인물들은 어디서 본 듯한 인물처럼 유형화되어 있지 않아 생동감이 넘친다. 이는 대본과 연출 못지 않게 창의성을 발휘한 배우들의 노력이 어우러진 결실이다. 작가 이금림씨와 연출자 성준기 PD가 한결같이 동의하는 대목이다.

오랫동안 스크린에서 활약해 온 이경영과 5년 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한 원미경은 부부의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탁월한 절제력으로 소화하고 있다. 특히 ‘빨간 양말’로 불리며 스타덤에 오른 성동일의 연기 자세가 주목된다.

국제통화기금 체제가 시작되면서 방송 드라마에도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는 ‘복고 바람’이 불고 있지만, 〈은실이〉는 사실감 넘치는 이야기 구조와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묘사로 단순한 시대극 차원을 넘어 모범적인 방송 드라마의 전범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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