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김소월의 <못잊어> 김 억이 먼저 썼다
  • 강원도 영월·成宇濟 기자 ()
  • 승인 1999.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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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수록한 김 억의 편지 발굴…소월의 발표보다 2개월 앞서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1902~1934)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못잊어>가 그의 스승 안서(岸曙) 김 억(金 億 1896~?)이 먼저 쓴 시임을 밝히는 자료가 발굴되었다. 4월3일 개관하는 영월책박물관(관장 박대헌)이 <시사저널>에 처음 공개한 이 자료는, 안서가 친구인 유봉영에게 1920년을 전후해 보낸 편지 10여 통과 엽서 13장이다. 소월의 <못잊어>와 비슷한 시는 안서가 ‘1923년 3월23일 평북 정주군 곽산’에서 보낸 편지에 실려 있다.

소월의 시 <제비>와 유사한 안서의 시 <사향(思鄕)>도 1919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편지에 적혀 있다. 이 편지에서 안서는 <사향>뿐 아니라 <이 門을 열으라> <아, 그것이나마 잇는가 업는가> 시 두 편과 함께 한시 네 편을 적어놓았다. 시 세 편에는 ‘1919. 5. 15. 京城서’처럼 시를 쓴 날짜와 장소를 명기했다.

안서의 편지를 받은 이는 평북 철산 출신으로 중국 상해와 봉천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71년까지 주필·부사장을 지냈던 유봉영(劉鳳榮·1897~1985)이다. 안서는 고향 정주에서 철산과 경성, 중국 봉천에 있던 친구에게 편지·엽서를 보냈는데, 5백76자(24×24) 원고지로 된 1919년 편지에는 ‘岸曙用稿’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안서가 2백40자(12×20) 원고지에 쓴, <못잊어> 풍의 시가 들어 있는 편지는 모두 4장이다. 안서는 여기에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산다’는 점을 시시콜콜하게 적었다. 문제의 시(85쪽 참조)는 안서가 친구에게 심각한 고민을 토로하면서 소개했다. 그는 시를 쓴 연유를 이렇게 밝혔다.
‘열일곱 살짜리 애인’ 떠나보내며 지은 시

‘狂人? 泥醉? 戀愛熱中? 이 세 가지만이 現實世界의 모든 苦痛에서 自由롭게 하여 주는 듯합니다.

眞正한 告白을 하면 나는 그동안 웃읍은 로맨쓰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아모것도 몰으는 十七歲의 所謂 生離別짜리와 놀앗읍니다, 한데 그것이 郭山 一周에 갓득히 所聞이 낫읍니다, 하고 저 便에서는 共同生活을 淸하여, 참말로 딱하엿읍니다, 만은 그것도 이제는 지나간 꿈되고 말앗읍니다.

온갓 힘을 다하야 다른 곳으로 살님 가도록 하엿읍니다. 罪를 지엇읍니다, 그러나 엇지합닛가, 사람의 맘이란 물과도 갓고 바람과도 갓튼 것이매, 그것을 엇지합니가. 日前에 이러한 말을-그말은 쓰지 안읍니다-듯고 卽興으로 詩 하나 지어주엇읍니다.’

안서가 ‘열일곱살짜리 애인’을 떠나보내며 ‘즉흥으로’ 지은 시에는 제목이 없다. 소월은 이와 비슷한 시를 1923년 5월에 발간된 <개벽> 35호에 처음 발표했다. 발표 시기는 안서의 편지보다 2개월 가량 늦다. <개벽>에 발표된 시는 <思慾絶Ⅰ, 못닛도록 생각 나겟지요>라는 제목으로, <진달래꽃>에 수록되기 전의 작품이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그런대로 歲月만 가랍시구려.//그러면 더러는 닛치겟지요,/아수운대로 그러케 살읍시구려.//그러나 당신이 니르겟지요,/「그립어 살틀이도 못닛는 당신을/오래다고생각인들 떠지오릿가?」’

안서의 편지에 실린 시와 <개벽>에 발표한 소월의 시, 그리고 <진달래꽃>에 수록한 <못잊어>는 시어와 리듬에서 차이가 날 뿐, 같은 시가 개작을 통해 변모해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만큼 내용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안서는 소월의 ‘특별한 스승’이었다. 안서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소월의 시재(詩才)를 발굴해 키웠으며, 그를 문단에 데뷔시키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 스승’이 되어 주었다. 안서는 소월이 쓴 대부분의 시를 미리 받아 첨삭(添削)·정서(正書)한 다음 잡지사에 넘겼다. 스승의 가르침은 소월 사후에까지 이어져, 안서는 소월의 유고를 ‘손질’해 각종 잡지에 발표했고, <소월시초>(39년) <소월민요집>(48년)을 펴내기도 했다. 안서는 시인으로서는 소월보다 ‘한 수 아래’였으나, 그의 평생을 이끈 각별한 스승이었다.

소월의 모든 시에는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이자 당대의 이론가였던 안서의 체취가 강하게 남아 있다. 이를테면, 소월 사후에 안서가 펴낸 <소월시초>에서 그는 소월의 시를 많이 고쳤다. <장별리(將別里)>라는 작품에서는 ‘우에나 아레나’를 ‘위에랴 아래랴’로, ‘가는 비’를 ‘가는 실비’로 수정했다. 평생 사제간이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안서가 소월에게 소재 준 듯

안서가 편지에 쓴 문제의 시는 소월이 시를 발표한 때보다 2개월 가량 앞섰고, 시를 쓴 동기가 분명한 만큼 원작자가 안서일 가능성이 크다(그러나 그 반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월의 습작 노트가 모두 안서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다). 96년 <김소월전집>(서울대학교 출판부)을 펴낸 김용직 명예교수(서울대·국문학)에 따르면, 이런 저런 추론이 가능하지만 안서가 소월에게 시의 소재를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에게 이런 소재가 있는데, 네가 재주가 있으니 써보아라’고 했을 가능성이다.

이같은 점은 이번에 함께 발굴된 시 <사향>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9년 5월15일 경성에서 쓴 <사향>은 5행으로 이루어진 시이다. 이 시는 안서의 첫 시집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 시집인 <해파리의 노래>(23년)에 같은 제목으로 조금 변형(6행)되어 실려 있으며, <진달래꽃>에 수록된 소월의 시 <제비>(3행)와도 비슷하다. <사향> 첫 행 ‘空中에 나는 제비의 몸으로도’와 <제비> 첫 행 ‘하눌로 나라다니는 제비의몸으로도’는 거의 똑같다.

김용직 교수는 안서의 편지에서 발견된 시들이 두 시인의 아름답고 긴밀한 정신적 유대를 확인케 하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안서의 시들은 한국적 사제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제 간의 끈끈한 관계를 생각하면 <못잊어>를 ‘누가 누구의 것을 베꼈다’는 식으로, 지금의 기준으로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군·사·부(君師父) 일체의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설사 누구의 것을 이용했다 해도 전혀 섭섭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서가 소월의 시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다고도 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안서는 1923년 유봉영에게 보낸 편지에서와는 달리, 1935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김소월의 추억>에서는 ‘일찌기 소월이가 노래한 <못잊어>의 한 편을 생각’하면서 소월의 자취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소월의 대표작인 <못잊어> <제비>의 원형을 밝혔다는 점 외에도, 안서의 편지들은 근대 문학사와 관련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양 근대 시들을 처음 소개한 안서의 영어·프랑스어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발굴된 자료에는 안서가 유봉영에게 영어로 쓴 엽서도 포함되어 있다. ‘Five days has been passed away since I had come to here’로 시작되는 영문 엽서는 번역가 김 억의 영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음을 증명한다. 또 다른 엽서에는 안서가 일본 ‘曉星中學校 編著‘ 불어 초보·중급·상급 자습용 교재를 주문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안서가 영·불 시를 주로 일어와 에스페란토어로 읽고 번역했다고 짐작했으나, 이 엽서는 그가 원전을 읽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편지에 따르면 절친한 친구처럼 보이는 안서와 유봉영이 어느 정도 관계였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삶과 예술을 논하며 두 사람이 나눈 수십 통 서신은 근대 문학사를 좀더 명확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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