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획기적인 한국학 총서 ‘나랏말씀’ 시리즈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7.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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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출판사, 한글 세대 위한 문고본 한국학 총서 ‘나랏말씀’ 시리즈 1차분 발간
<완당전집> <다산시문집> 등 고전 국역 총서를 발간하고 있는 솔출판사가 새로운 한국학 총서를 펴내기 시작했다. ‘나랏말씀’이라는 시리즈 제목으로 묶는 이 총서 앞에는 ‘세계화 시대를 주체적으로 열어갈 우리 전통 문화의 보고(寶庫)’라는 슬로건이 걸려 있다.

최근 서점에 진열된 나랏말씀 총서 1차분은 <삼국유사>(전 2권) <다산문선> <열하일기> <성호사설> <용재총화> <산림경제> 등 모두 여섯 가지. 민족문화추진회(민추) 박찬수 사무국장, 송기호 교수(서울대·국사학), 신승운 교수(성균관대·문헌정보학), 정 민 교수(한양대·국문학), 한문학자 조수익씨 등 총서 편집위원은 다음과 같은 편집 원칙을 세웠다.민족 문화의 원형질을 이루는 고전들

먼저, 민추 고전국역총서와 한국학 주요 고전이 가지고 있는 원전의 맛을 살리면서도 무거운 주제를 탈피해, 한글 세대가 읽어도 충분히 소화해낼 만한 내용을 가려 뽑되, 정본을 지향한다. 둘째, 여러 권의 책을 단권화하고 본문 내용도 간소화하여 가독성을 높인다. 셋째, 지식 대중의 기호에 맞게 한문투와 고어투 표현을 가능한 한 줄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한문에는 주석을 단다. 그리하여 고전국역총서의 아들인 나랏말씀 총서는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원)생, 그리고 일반 지식 대중, 즉 한글 세대 전반과 만나고자 한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총서의 맨 앞에 내세운 이유는 분명하다. 이 고전은 한국 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언어 민속 사상 미술 고고학 등 민족 문화의 총본산이자 우리 겨레의 무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신화이기 때문이다. 이재호씨가 근 30년에 걸친 번역과 수정, 교정 끝에 완성한 이번 <삼국유사>는 한글판 결정본을 지향하고 있다.

사마천 <사기>의 체제를 모방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중국 기록만을 인용한 데 견주어, 중국의 <고승전>과 같은 형식으로 엮은 <삼국유사>는 우리나라의 고문서와 민간 기록을 적극 수용해 민족 기원의 원형을 보존하는 데 주력했다. ‘기이편’ 서문은 이 책의 집필 목적이 뚜렷함을 밝히고 있다.

역자에 따르면, <삼국사기>가 유가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 방식에 의해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신화와 전설을 주관적으로 폄하했다면, <삼국유사>는 단일 민족의 우수성을 북돋우는 데 주력했다.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단군을 중국 천자에 비견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라고 규정하고, 천자의 죽음에만 사용하는 붕(崩)자를 썼다. 이같은 용례는 다른 역사책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일연은 또한 중국 요임금 시대와 같은 시기에 단군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신화를 앞세워 우리나라가 중국의 종속국이 아니라 자주 국가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했다.

총서 제6권인 <다산문선>(민추 엮음)은 철학에서 윤리사상, 정치·경제는 물론 과학과 사회사상, 문학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다산의 저술 가운데 다산의 인간적 면모를 읽을 수 있는 글들을 간추렸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는 말에서 호를 따온 다산의 인품은 열세 편의 기(記)에서 배어나온다. 이 책은 지난해 하반기에 나온 고전국역총서인 <다산시문선>에서 기(記) 전(傳) 서(書) 설(說) 논(論) 등 80편의 글을 선별한 것이다.

다산은 기 열세 편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담담한 인품을, 전 다섯 편에서는 올곧은 선비나 효자를 통해 부패한 사회 현실 속에서도 인물이 엄연히 살아 있음을, 가훈과 편지 들에서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애정을, 설에서는 종두치료법과 같은 실용적 생각들을, 논에서는 효자·열부·충신·서얼제의 허상과 부당한 점을, 기사와 잡문에서는 부패한 관리들을 풍자했다.

북학파의 거성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민추 엮음)는 총 스물여섯 편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며> <성경잡지> <역마를 달리며 적은 수필> 등 세 편을 뽑아 실었다. 중국의 산천과 풍물을 화려하고 웅장한 문체로 정밀하게 기록한 연암은, 당시 서양 신학문을 도입한 청나라 문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 문물을 도입해 이용 후생을 도모코자 함이었다. 특히 <압록강을 건너며>는 문장이 헌걸차고 속도감이 있으며 비교문화적 안목이 높아 책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 익의 <성호사설>(민추 엮음)은 대하 소설 <장길산>과 <임꺽정>의 모태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의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그 대안을 전개했던 성호는, 이 ‘자질구레하고 하찮은 이야기’에서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 학문과 사상, 혼인 및 제례, 인물과 사건에 대한 고사 등을 다루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열권 분량 9백90편의 글 가운데서 조선 시대 사회 문화에 대한 지식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편 1백28편을 뽑았다.

<성호사설> 옆에 성 현의 <용재총화>(민추 엮음)가 놓인다. 고려에서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변화한 민간 풍속과 문물 제도 문화 역사 지리 학문 종교 문학 서화 음악 등을 망라하고 있다. 왕실과 세가를 비롯해 장상 시인 문인 음악인 그리고 과부 승려 무당 기생 탕녀 등 천대받던 계층까지 등장한다. 이 책은 유명인들의 일화와 해학담, 서민과 천민의 우스갯소리를 집대성한, 민속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유중림의 <산림경제>(민추 엮음)는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증보한 농서(農書)인데, 집안 건사하기, 대잇기, 아이 키우기 등 세 편을 따로 국역했다. 산림에 묻혀 살면서 지켜야 할 생활 규범과 농촌 생활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상세하게 일러준다.

나랏말씀 총서는 올 상반기에 유길준의 <서유견문록>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 황의 <퇴계집>(전 2권) 이규보의 <이규보시문선>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등 20여 권이 나오고, 내년까지 모두 97권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그동안의 <삼국유사> 오역·표절 심각

나랏말씀은 한국학 르네상스를 위한 최초의 본격적 터닦기라는 큰 의미를 갖지만, 이 총서는 동시에 한국학 부흥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새삼 확인시키고 있다. 나랏말씀 총서 첫째권인 <삼국유사>를 옮긴 한학자 이재호씨(78·부산대 명예 교수)는 30년 만에 <삼국유사> ‘결정판’을 내놓으면서 오역과 표절이 판치는 고전 국역계를 질타했다.

이씨는 최근 발표한 논문 <출판 문화의 난맥상--특히 작품의 표절·도작 행위를 논함>에서 무엇보다도 고전 국역자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광복 이후 30년 가까이 학교 교육이 한문 교육을 도외시한 까닭이다. 이씨의 논문에 따르면, 현재 한문 해독자는 거의 칠순 이상 고령이고 40~50세 이하는 거의 없는 형편. ‘전통 문화 계승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고 논문은 지적했다.

이씨가 보기에, 10여 종에 달하는 문고본 <논어>는 원전을 제대로 번역한 것이 거의 없고 특히 <삼국유사>의 오역과 표절 문제가 심각하다. 현재 서점에서 유통되고 있는 <삼국유사> 번역본은 10여 종인데, 57년에 발간된 이병도 역주 <삼국유사>(동국문화사)에는 오역이 무려 3백70여 곳에 이르고, 59년 북한 고전연구원이 간행한 <삼국유사> 역시 오역이 적지 않다고 이씨는 지적했다. 뿐만 아니다. 67년에 <삼국유사>(상하권)를 역주한 바 있는 이재호씨는 논문에서 그 이후 나온 번역본 대부분이 자기 것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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