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상]개성 죽이는 획일 패션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8.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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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젊은이들, 최신 유행 맹목적 추종
미국 워싱턴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문 아무개씨는 지난해 여름 개인전을 열기 위해 5년 만에 서울에 왔다가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옷을 깨끗하게 입고, 특히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예쁘게 보이더라는 것이다. 문씨의 눈에 비친 한국의 젊은이들은 패션 모델이나 다름없었다. 거의 모든 젊은이가 최신 유행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 경향이 사회 지배

거리에 흘러넘치는 유행은 자기 표현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옷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 중·고생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학생이라면 열 가운데 아홉은 배낭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닌다. 그 중에서도 이스트팩이나 잔스포츠 같은 미국산 브랜드가 절반이 넘는다. 남자들은, 중년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머리를 짧게 친다. 안경은 남녀를 불문하고 작고 동그란 테를 선호한다.

무선 호출기(삐삐)는 초등학생들까지 사용하는 생활 필수품으로 정착했고, 핸드폰 사용자도 얼마전 천만 명을 돌파했다. 시간이 곧 돈인 비즈니스맨들의 업무용 기기가 이제는 학생들도 손쉽게 사서 쓰는 기호품이자 패션 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 신촌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친구 여섯 명 가운데 다섯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사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따라 사게 되었다. 특별히 필요하지는 않지만, 값도 싸고 편해서 들고 다닌다”라고 말했다.

거리 패션과 여성들의 헤어 스타일은 계절에 따라 빠르게 순환하는 반면, 안경과 남자들의 헤어 스타일, 학생들의 가방은 순환 속도가 느린 편이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와 관계 없이 유행은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위력적이다. 유행이 대다수 사람을 포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옷을 입든, 주말에 여행을 떠나든 ‘남들이 하니까 한다’는 경향이 지배적인 분위기인 것이다.

배낭 같은 가방이 주류 패션으로 떠오른 것은 94년 이스트팩이라는 브랜드가 국내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어깨에 딱 달라붙고 책을 많이 넣을 수 있다’는 실용성 때문에 각광받은 배낭 식 책가방은 어느덧 학생을 상징하는 가장 확실한 기호로 작용하고 있다. 네모꼴에다 렌즈도 컸던 안경이 작고 동그란 달걀형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들어와서였다. 안경이 작아지는 것은, 가볍고 깨끗함을 선호하는 경향 때문이다. 남자들이 마치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깎는 것도 안경을 선택하는 기준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유행 안 따르면 촌스럽다는 강박 관념 팽배

하나의 유행과 경향이 거리를 뒤덮는 현상은, 달리 말하면 시장 상황이 강요한 것이기도 하다. 안경점에 가든 이발관에 가든 남자들에게는 선택할 여지가 별로 없다. 유행을 따르고 싶지 않아도 매장에서 마땅히 선택할 것이 없다. 자기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보니,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유행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유행이 획일화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의 지배적인 경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한국 사회가 잘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10년 동안 유학하고 귀국한 ㄱ대 사회학과 현 아무개 교수는, 옷과 헤어 스타일 때문에 고통스럽고도 오랜 적응 기간을 거쳐야 했다. 화려한 꽃무늬가 있는 와이셔츠·넥타이와 짧은 머리에 무스 바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귀국 후 교수 사회에서 ‘또라이’ 취급을 받았다. 겉으로야 물론 멋있다고 한마디씩 했지만, 그의 옷·헤어 스타일과 관련해 좋지 못한 이야기들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수군거리는 뒷얘기를 감당하지 못해 화려한 셔츠를 흰색으로 바꾸었고, 이발관에 가서도 ‘뒷머리를 이부로 깎느냐, 살이 하얗게 드러나도록 깎느냐’를 두고 한참 고민해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일상 생활에서 집단 문화가 너무 강하다. 우리 사회는 튀는 모습을 용납하지 않아 지금도 ‘개성 죽이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행하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사회 심리는 튀는 것뿐만 아니라, 유행에 처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화여대 앞 준오미용실에서 헤어 디자이너로 7년째 일하고 있는 은현숙씨는 대부분의 손님이 ‘유행을 따르지 않으면 뒤진다, 촌스럽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손님들은 탤런트 누구처럼 해달라는 말을 자주 한다. 특이한 스타일을 제안했을 때 받아들이는 사람이 드물고, 개성보다는 일반 유행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아 헤어 디자이너로서 별로 재미가 없다.”

‘국민 소득 만달러’ 시대의 패션 수준 반영

대중 매체, 특히 90년대 들어 텔레비전이 큰 힘을 발휘하면서 브라운관 스타들이 어느 때보다 강력한 ‘패션 리더’로 떠올랐다(73쪽 상자 기사 참조). 대중은 옷과 액세서리, 안경 등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데 별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개처럼’만 하면 촌스러움은 일단 면하기 때문이다. 백화점 매장에서 손님을 맞을 때면 ‘이것은 누가 입었던 옷이다’라는 말이 가장 잘 먹힌다. 손님들 가운데도 아예 취향이나 체형에 관계 없이 ‘최진실처럼, 이승연처럼, 김희선처럼’ 입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다.

패션 전문가들은, 한국 사람들이 유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소득 수준과 관련해 설명한다. 지금은 원화 가치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지만, 국민 소득 만달러는 ‘남에게 보이기’에 치중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패션 쪽에서 보면 이 시대는 옷, 그 가운데서도 브랜드로 남과 차별화하려는 시대이다. 너도 나도 남들과 달라 보이려고 첨단 유행을 따라가다 보니 거꾸로 하나의 경향이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 쁘랭땅백화점과 대구 동아백화점에서 상품을 개발하고 있는 김대권 과장의 말이다.

국민 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선 선진국에서는 하나의 유행이 거리를 휩쓰는 법이 별로 없다. 대중 문화 평론가로서 최근 <나는 일본 문화가 재미있다>라는 책을 펴낸 김지룡씨에 따르면, 일본에는 유행하는 패션이라는 것이 없다. “최근 들어 아마도 가장 참여율이 높았던 유행은 여고생들이 헐렁헐렁하게 신는 하얀 양말인 루즈 삭스일 것이다. 그러나 루즈 삭스는 여고생 매춘과 관련해 크게 부각되었을 뿐, 실제 참여율은 20∼30%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그 정도만 해도 큰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인다”라고 김씨는 말했다. 그 외의 패션 붐은 기껏해야 참여율이 10% 정도여서, 한번 히트하면 거리를 지배하는 한국의 유행과 견주기에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선진국을 여행하는 한국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외국인들의 겉모양만을 보고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보다 패션 감각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 사람들은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차원을 달리한다. 의류업체들이 마케팅 차원에서 선도하거나 개발하는 새로운 유행에 그들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남에게 보이기’보다는 ‘자기 만족’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이른바 ‘토털 패션’‘라이프 스타일’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15년째 패션 컨설팅을 하고 있는 일본인 패션 전문가 다나베 히데노리(주식회사 톰인터내셔널 대표)씨는 한국의 수준을 패션화의 1단계라고 진단한다. “90년대 이전 한국에는 오피니언 리더가 일부 있었을 뿐 유행이 요즘처럼 대중화하지 않았다. 90년대 이후 대중이 트렌드·유행·패션이라는 말에 민감해졌다. 그러나 패션 경향이 성숙하면 할수록 겉으로 보이는 옷보다는 라이프 스타일을 중요시하게 되는데, 그것은 무조건적인 추종이 아니라 유행을 적절히 받아들이면서 자기 나름으로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같은 관점에서 한국은 지금 2단계 직전이자 1단계의 완숙기라 할 수 있다.”

패션의 2단계는 자기 개성을 앞세우는 시대이다. 남을 의식해 바깥에 나갈 때만 멋있는 옷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에 일관성을 갖는 단계이다. 이쯤 되면 옷에 대한 관심보다는 홈 패션, 집안 환경, 자동차 등으로 관심이 확산되어 남이 보든 안 보든 자기에게 맞는, 혹은 자기 만족을 찾는 전반적인 조화에 더 역점을 둔다. 개인의 일상 환경을 ‘코디’하는 개성이 최상의 가치로 여겨지는 단계이다.

“개성 표출에 대한 심리적 제재 너무 많아”

시장 자체가 좁은 데다 여러 경향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은 만큼,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기대하기가 아직은 성급한 일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개인 취향보다 집단의 상식을 더 우선시하는 사회 분위기, 문화 평론가 이성욱씨의 표현대로 ‘마광수나 장정일처럼 금기의 선을 넘으면 잘라 버리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유행이라는 집단적 취향에 편승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판도 면할 수 있는 방법이다. “개성 표출에 대한 구체적인 제재가 없다 하더라도 심리적인 제재가 얼마나 많은가. 획일적인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교육적·문화적 각성이 없다면 이같은 분위기가 오래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이씨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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