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소설의 `겹눈 리얼리티` 미학
  • 고영직 (문학 평론가) ()
  • 승인 2004.03.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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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로 본 김영하 문학
해찰하는 듯싶지만 진지하고, 무심한 듯싶지만 비범하다. 김영하의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창비)를 읽는 행위는 유머와 아이러니라는 두 지점 사이에서 끊임없이 왕복 운동을 하는 듯한 묘한 체험으로 이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그 여진은 오래 남는다. 연애와 가족 해체 그리고 정체성 혼란과 음모론 같은 문제를 다루는 김영하 소설은 세상 이면에 대한 어떤 겹눈의 눈뜸을 가능하게 한다. 이 말은 김영하 소설이 우리 시대의 객관 현실에 대한 문학적 리얼리티 구현과 잇닿아 있다는 점을 뜻한다.

김영하는 옛날이야기 차용조차 ‘모던한’ 서사로 치환하는가 하면(<아랑은 왜>), 기존 대하 역사소설의 전통적 서사 틀을 해체하고 전복하는 (포스트)모던적 역사소설의 실험을 통해 개인주의와 같은 새로운 가치의 구현을 적극적으로 제기한다(<검은 꽃>). 김영하의 작품을 읽다 보면 근대 자본주의적 현실의 풍경화로서의 이미지를 길어 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김영하는 현실의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근대의 풍경을 노련하게 포획할 줄 아는 ‘전문 사냥꾼’ 같은 감각의 소유자이다. 5년 만에 출간된 소설집 <오빠가 돌아왔다>에서도 이런 특장은 그대로 확인된다. 표제작을 포함해 여덟 편의 소설이 수록된 이번 작품집을 지배하는 주 음조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존재 양상들에 대한 집요한 탐사이다.

이 불안감은 문제작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흔들림’이라는 촉각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 흔들림은 처음에는 미미한 떨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소설가인 ‘나’를 비롯해 바오로 신부와 미경 등 등장 인물의 전 존재를 뒤흔들어 놓고 그들 모두를 침몰시킨다. 왜? 그것은 일상의 공허(바오로 신부), 남편의 자연 발화(미경), 무엇을 ‘위한’ 문학적 열정 부재(나) 때문이다.

이들은 각자 처한 환경에 의해 정체성 혼란을 겪지만, 어떤 대상을 향해 연소(燃燒)하려는 의지를 상실했다는 점에서는 결국 일치한다. 바오로 신부와 미경의 정사는 그 상흔의 크기를 암시한다. 이 상황에서 소설가인 나는 “나에겐 누군가의 영혼에 어둠을 드리울 그 무언가가 없었다”(33쪽)라는 회한의 눈물을 떨군다.

추리적 기법을 빌려 의문의 살해 사건을 둘러싼 심리 변화를 추적한 <크리스마스 캐럴> 또한 일상과 정체성의 거대한 균열을 다루기는 마찬가지다. 남자 셋의 공동 애인이었던 한 여자의 죽음을 대하는 두 남자의 착종된 심리는 팽팽한 인력(引力)처럼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러한 특징은 두 남자의 의도와 행위가 계속 엇나가면서 기묘한 아이러니를 유발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즉 모욕과 배반의 모티프라는, 두 남자가 겪게 되는 내면적 갈등 상황은 작품의 밀도를 더해준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독자들 역시 빼도 박도 못할 ‘살인 공범자’ 신세를 면치 못한다. 무엇보다도 한 단락으로만 이루어진 소설 구조는 무죄 증명조차 할 수 없게 된 언어의 감옥을 연상시킨다.

김영하는 이번 소설집에서 어떤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검은 꽃> 이후 주요한 글쓰기 전략이 된 아이러니 양식의 우세종이다. 물론 김영하는 허무주의와 냉소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표제작의 성취처럼 아이러니적 글쓰기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하다. 결국 이러한 특징은 세계와 개인 사이의 거리 감각을 더욱 의식하겠노라는 작가적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젊은 문학의 어튜리뷰트(attribute)가 된 대중 문화 차용에서 탈피해, 현실의 리얼리티 속으로 침잠하려는 작법 태도는 그 좋은 단서가 된다. <너의 의미>의 경우처럼 영화와 소설의 ‘역전된’ 위상학을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단적으로 표제작 <오빠가 돌아왔다>는 김영하 문학의 새로운 리얼리티 구현 모색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 작품은 열네 살 사춘기 소녀 화자가 가족이라는 ‘힘’과 ‘짝’, 즉 권력(=돈)과 섹스에 의해 유지된다는 식의 ‘싸가지 없는’ 관점을 일관되게 보여주는 등 자못 황당하다. 그럼에도 이 소녀 화자의 삐딱한 언행이란 일종의 아이러니 기법으로써 ‘참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 부메랑 효과를 적절히 구현하는 장치가 된다.

그렇다고 김영하는 문학이 ‘방황하는 청춘을 구원’(25쪽)하지도 않으며, ‘여자들을 위한 문학’(30쪽)은 더더욱 아니라고 못박는다. 어차피 문학이란 바르트의 시도처럼, ‘~이다’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학은 ~이다’라는, 견고한 이론 신앙으로 포섭되는 순간, 현실과의 풍부한 대화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문학적 양극단의 편향을 넘어서려는 2000년대의 글쓰기를 김영하가 어떤 식으로 계속 열어갈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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