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 미국 대중 문화 100년사
  • 李文宰 기자 ()
  • 승인 1997.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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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찰스 패너티의 <문화와 유행 상품의 역사>를 통해 본 ‘미국 대중 문화 변천사’
두차례 세계 대전을 거치며 전지구를 장악한 미국 대중 문화의 스타트 라인은 1890년대다. <배꼽티를 입은 문화>로 국내 독자에게도 낯익은 언론인 출신 미국 작가 찰스 패너티의 <문화와 유행 상품의 역사> (이용웅 옮김·자작나무 펴냄)는 1890년대에 ‘즐거운’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준다. 그 시기에 미국은 빅토리아식의 은둔과 순박한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 자유 분방한 미국식 생활 규범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국 대중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며 즐거운 시대로 몰려갔다.

찰스 패너티는 ‘최초의 미국인’이었던 깁슨 걸과 깁슨 맨으로 미국 대중 문화사 100년사의 막을 올리는데, 깁슨 걸과 깁슨 맨은 삽화가 찰스 다나 깁슨이 만들어낸 첫 미국인상이었다. 깁슨 걸 이전의 미국 여인상은 19세기 후반 유럽 유행을 수입해 모방하고 있었다. 머리를 이마 위로 높이 빗어 올리고 허리선을 꽉 죄고 도도하게 뽐내는 깁슨 걸은 이후 요녀·플래퍼족·미스 아메리카·섹스 심벌·바니 걸스 등으로 이어진 미국 여인상의 어머니였다.

대중 문화사를 알면 미국이 보인다

18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백 년을 10년 단위로 끊고, 자동차·춤·팝송·영화·라디오·텔레비전·베스트 셀러·대중 매체·언어·게임·장난감·라이프 스타일 등 대중 문화의 거의 전부문을 순례하는 찰스 패너티는 네 가지 주제, 즉 대중 문화 확산,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힘, 유행의 영향력, 그리고 이 세 가지를 가능케 하는 여가를 통해 미국 대중 문화사를 정돈하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전 3권인데, 2권까지만 나와 있고 6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다룬 3권은 11월 말께 출간된다).

미국 대중 문화를 만들어 낸 주역들과, 그 대중 문화가 히트를 치게 된 사회문화적 배경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대중 문화의 ‘고향’을 확인할 수 있다(110쪽 상자 기사 참조). 예컨대 훌라후프는 물론이고 컬러 텔레비전 시대 직전 흑백 텔레비전 화면 앞에 끼우던 무지개색 플라스틱판, 색종이 퍼레이드, 베스트 셀러 목록, 최불암 시리즈와 같은 농담 시리즈의 원조도 미국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놀이들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30년대 대공황 시기에 하버드 대학에서 시작된 금붕어 삼키기 같은 게임은 그 발생 원인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 전지구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중 문화의 대부분이 미국을 원산지로 한다는 견해에 동의한다면 이 책을 세계 대중 문화사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렇다고 이 대중 문화사를 미국으로 한정한다고 해서 의미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미국을 가장 빠르고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 바로 이 대중 문화 100년사인 것이다.

미국 대중 문화 100년사는 기성 세대와 신세대 사이의 싸움의 역사다. 새로운 대중 문화가 등장할 때마다 언론·교회·학계 등은 말세의 징후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비상하는 1920년대’에 등장했던 신여성 플래퍼족에 대한 기성 세대의 냉혹한 시선이 그 좋은 예이다. 플래퍼라는 용어는 막 날기를 배우려는 새끼 야생 오리에서 유래했다. 톰보이(말괄량이)로도 불렸던 플래퍼족의 겉모습은 반항적인 소년처럼 투박했다. 그들은 성해방 전쟁의 여전사들이었다.
20년대 미국 신여성에 대한 당시의 언급은 다음과 같았는데, 90년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신에게 그들의 행동은 어쩌면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고, 그들의 생각이 모호해 보일 수도 있다. 옷은 또 얼마나 거칠어 보이겠는가. 당신이 젊은 세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은 자유이지만, 그들이 우리 시대의 사상과 문학과 관습 등에 매우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사람들의 구매 습관과 상업 활동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은 더더욱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화와 유행 상품의 역사>는 대중 문화를 엘리트 문화와 민속 문화와 구별하면서 그 정의를 내린다. 엘리트 문화가 배타적이고 고전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민속 문화의 창조자와 관객은 전통적인 생활 문화를 공유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반면 대중 문화는 말 그대로 대중이 즐기는 문화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심오함을 거부한다.

대중 문화 옹호론 못지 않게 대중 문화 비판론도 거세지만, 패너티는 허버트 갠스의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에 기대 대중 문화를 찬양한다. 허버트 갠스는, 대중 문화는 미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부산물이 아니며 엘리트 문화나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존재도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패너티는 위 책을 읽고 난 다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미국 대중 문화 100년사를 집필할 수 있었다.

패너티에 따르면, 미국 사회의 힘은 어느 순간에는 진지했다가도 돌아서면 금세 어리석어지는 능력에 있다. 그리하여 미국 대중은 배꼽춤을 출 수 있고, 주정부가 발행하는 복권을 구입해 내기를 걸 수도 있다. 패너티는, 미국 대중이 대중 문화를 즐긴다고 해서 문명이 붕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패너티가 일러주는 역사 안내(연대기)를 약간 비틀어, 장르 별로 미국 대중 문화 100년사를 거슬러올라가 보자.

깁슨 걸에서 시동을 건 미국 대중 문화에서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미국이 지역 고립주의에서 벗어나며 ‘순수한 1900년대’가 시작되었다면, 191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제1차 세계대전과 맞물리면서 대중 문화 산업이 확산되던 1910년대를 패너티는 섬세한 시대라고 명명했는데, 이 시기에 미국 대중은 자동차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1908년 헨리 포드에 의해 처음 생산된 T형 자동차는 대량 생산 및 대량 소비 시대의 신기원이었다.
자동차·춤·전쟁이 ‘문화 지도’ 새로 그려

초기 자동차 시대에는 자동차와 관련한 농담도 유행했다. ‘당신은 포드차의 완충기로 무엇을 쓰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 정답은 ‘승객’이고 ‘전도사 빌리보다 사람들을 더 떨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의 정답은 ‘포드 자동차’라는 식이었다. 이것이 시리즈 농담의 효시였다. 이때의 한 통계에 따르면, 노동자 가운데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은 25%였고, 집을 사기 위해서라고 답한 사람은 고작 10%였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은 무려 65%에 달했다.

이 시기에 미국내 자동차 수는 6백만 대를 넘어섰고 의회는 도로건설촉진법을 제정해 광범위한 고속도로망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자동차는 미국 번영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전쟁이 수많은 언어와 풍속을 생산하듯이, 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펑크·충돌·번호판·난폭 운전·교통 경찰·속도 위반·딱지·주유소·주차장 같은 말은 이때 태어났다. 포드가 열어젖힌 자동차 시대는 ‘전설의 50년대’에 새롭게 거듭났으니, 딱정벌레차가 대유행했고 10대들에게 자동차는 신이었다.

미국 대중 문화사는 춤의 역사이기도 했다. 요즘 들으면 이해가 잘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왈츠가 처음 미국에 도입될 때 신·구 세대는 격렬하게 맞붙었다. 1890년대 미국에서는 두 가지 춤이 유행했는데, 하나는 유럽에서 건너간 왈츠이고 또 하나는 신대륙에서 탄생한 투 스텝이었다. 당시 왈츠는 ‘더티 댄싱’이었다. 당시 신문은 왈츠를 ‘접촉 전염병’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왈츠는 ‘권력 당국의 재가나 댄스 강사의 지도 없이 대중의 인기를 모은 최초의 춤’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0년대의 애니멀 댄스, 20년대의 댄스 마라톤(누가 춤을 오래 추는가 겨루는 시합), 40년대의 안절부절하면서 신경질적인 지터버그(지르박) 스텝 등으로 이어지면서, 춤에 대한 광적인 유행은 거의 10년을 주기로 그때마다 격렬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키며 미국 대륙을 뒤흔들었다.

미국 대중 문화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두 차례 세계 대전은 미국 대중 문화의 토대를 바꾸어 놓았다. 이른바 대중 문화 산업계의 전쟁 특수.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미국 사회에는 처음으로 ‘10대’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아버지와 형들을 전쟁터로, 어머니와 누이를 군수 공장으로 보낸 10대들은 곧 가장이었다. 당연히 이들이 소비 주체로 떠올랐다. 음반 회사나 주크박스 회사들은 이들을 겨냥했다. 40년대는 청소년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했던 시대였고, 스타를 선망하고 추종하는 10대(바비 삭서)들이 이때 등장했으며, 10대를 위한 잡지가 창간되었고, 신문들도 저마다 10대를 위한 지면을 설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새로운 남성상은 ‘지 아이(GI)’였다.

<문화와 유행 상품의 역사>는 미국 대중 문화가 곧 세계 대중 문화임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 대중 문화의 막강한 전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강준만 교수(전북대·언론학)의 <대중 문화의 겉과 속>은 그 요인을 다음과 같이 짚었다.

우선 미국 행정부는 20년대부터 대중 문화 산업을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영화 수출에 열을 올렸는데, 영화가 전세계에 미국의 라이프 스타일을 전파해 미국의 다른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미국의 군사적 패권이 미국 대중 문화를 전세계에 퍼뜨리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세 번째로는, 미국의 독특한 역사이다. 미국은 역사가 짧은 이민 국가여서 대중 문화가 다양한 문화를 사회적으로 통합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실용주의적인 사회과학도 대중 문화를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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