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음악] 성인 음악은 어디로 갔나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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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반란’ 후 음반 시장·공중파 방송서 외면…조용필·양희은 등 ‘부활’ 앞장
"객석 반응이 아무리 썰렁해도 절대로 기죽지 말라."

지난해 중견 가수 최백호씨가 텔레비전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 무대에 올랐을 때 동아기획 김 영 사장은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중견 가수에게 기 죽지 말라니? 그러나 10대들의 함성만 가득한 그 무대에서 주눅 들지 않을 중견 가수는 거의 없다.

가요 프로그램의 중견 가수들만 주눅이 드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신세대로 통칭되는 나이 어린 대중을 제외하고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뿐 아니라 황금 시간대의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시청자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주류 대중 문화가 10대만의 문화로 변모한 지 오래인데다, 청소년들의 대중 문화 장악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갈 곳 없는 현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대중 문화에 관한 한 성인들도 갈 곳이 없다. 그들은 음반 시장에서도 내침을 당한다. 나이에 걸맞는 음반 찾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방송과 시장에서 이래저래 주눅이 든 성인 대중이 겨우 찾는 곳은 노래방과 술집이다. 그나마 노래방에서도 그들의 새 노래는 없다. 흘러간 노래만 되풀이해 부를 뿐이다. 청춘 시절, 그들이 열광했던 팝가수들이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97쪽 상자 기사 참조)은 말 그대로 먼 나라 남의 일이다.

대중 문화에서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대중 음악이 10대만의 음악으로 급속하게 변모한 것은 90년대 들어서이다. 그 기점은 정확하게 92년 6월 서태지와아이들(서태지)이 등장한 때이다. 이들의 활동이‘현상’에서‘반란’으로, 또 ‘혁명’으로까지 평가되는 까닭은, 한국 대중 문화의 판도가 서태지 등장을 기점으로 하여 완전히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신중현, 80년대 조용필의 뒤를 이어 서태지는 90년대의 대표자로 기록될 만큼 뚜렷한 음악적 성과를 낳았으나, 그 역기능 또한 컸다. 서태지 자신은 물론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서태지의 혁명은 결과적으로 대중 문화 획일화, 다시 말해 대중 음악을 10대 댄스 음악 일색으로 뒤덮어 버렸다.

신세대 음악이 텔레비전·라디오 점령

80년대부터 들국화·김현식·이소라 등 20대 이상 성인 취향의 음반을 제작해 온 동아기획 김 영 사장에 따르면, 92년을 기점으로 하여 음반 시장에서 스테디 셀러가 사라져 버렸다.

“92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회사의 스테디 셀러가 1년에 백만 장 넘게 팔려 나갔으나, 댄스 음악 시대가 온 다음부터는 스테디 셀러라는 개념 자체가 거의 없어졌다. 음반 소매점에서 바로 현금이 되는 댄스 음악 음반을 꽂을 자리도 모자랐기 때문이다”라고 김사장은 말했다.
서태지의 혁명과 맞물려 성인 대중 문화를 침몰시킨 것은 SBS 개국이다. 91년 말에 시작된 민영 텔레비전 방송은 시청률 무한 경쟁에 불을 붙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시청률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10대 시청자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시청률에 목을 매다시피 한 제작자들은 프로그램에 즉각적이고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10대 시청자를 최고 손님으로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같은 분위기가 라디오에까지 번졌다는 점이다. 라디오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한 PD는 “소리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하는 댄스 음악을 라디오가 굳이 들려줄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10대 위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은, 청취율 높이기라는 회사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라디오도 휩쓸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0대 문화, 곧 신세대 문화는 90년대 한국 대중 문화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92년 이전 음악이 멜로디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신세대 음악은 리듬과 비트를 앞세운다. 기성 세대가 백인의 스탠더드 팝을 선호한 반면, 10대는 검은 색 피부와 랩으로 대표되는 흑인 음악에 젖어 있다. 성인들이 읽고 듣는 문화에 익숙해 있다면, 영상 세대인 젊은 대중은 보는 문화에 익숙해 있다. 이같은 차이말고도 두 세대 사이에는 자기 표현과 욕구를 분출하는 방식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김창남 교수(성공회대학·신문방송학)에 따르면, 권위주의 시대를 살아온 기성 세대는 자기 표현을 억누르는 데 익숙하다. 성인들이 자기 욕구 표현 방법뿐 아니라 표현의 가능성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반면, 80년 컬러 텔레비전과 더불어 성장해 문화 세례를 흠뻑 받은 세대는 자기 표현력이 강하다.

한국 사회 분위기도 성인에게는 일의 책임만 강조할 뿐‘즐길 권리’는 허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성인들이 대중 문화를 소비하며 욕구를 분출하는 데 죄책감마저 갖는 데 견주어, 신세대는 욕구를 분출하고 소비하는 데 죄책감이 없다. “그러나 억압적인 입시 교육에서 성장하는 신세대들은 문화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방법 외에는 욕망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문화산업이 그들을 타깃으로 삼자, 시장이 삽시간에 재편된 것이다”라고 김교수는 말했다.

앞서 말했지만, 성인들이 문화 소비에 소극적이라는 사실은 방송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성인을 위한 대중 음악 프로그램을 아무리 만들어도 성인들은 꿈쩍하지 않는다. 올 봄까지만 해도 MBC 텔레비전에는‘토토즐’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했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라는 음악 프로그램이 있었다. 80년대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이 프로그램이 브라운관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10대들의 시간(저녁 7시)에‘불경스럽게도’성인을 위한 음악으로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양희은 “음반 3만장 팔리는 게 소원”

“10대가 프로그램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고, 볼 것이 너무 없다는 성인 시청자를 고려해 성인 취향 음악을 위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라고 제작을 담당했던 주철환 PD는 말했다. 탤런트 황신혜를 MC로 내세우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 서지 않던 중견 가수들을 불러들인 이 프로그램은, 시청률이 줄곧 10% 안쪽에 머물러 방영한 지 6개월 만에 10대 프로그램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성인들이 등을 돌린 탓이다.

성인들이 등을 돌리는 경향은 대중 음악 시장에서 더 뚜렷하다. 91년 미국에서 귀국해 활동을 재개한 가수 양희은씨는 중견 가수 가운데서는 비교적 활동을 활발히 한 편이다. 새 앨범을 2장 발표했으나 그 또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음반 3만장 팔리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양씨가 말할 만큼, 성인 취향 앨범이 바로 그 성인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만 것이다. 80년대에 비해 음반 시장이 10배 이상 커지고, 한국 시장이 세계 6~7위권으로 올라섰으나 갈수록 심해지는‘빈익빈 부익부’현상으로 성인 대중 문화가 설 최소한의 자리마저 빼앗긴 것이다.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한국 대중 문화계는 불모지나 다름없다. 한국 대중 가수만큼 빈부 격차가 심한 직업도 드물다. 한 달에 수백 장씩 음반이 쏟아져 나오지만, 이른바 ‘빅 5’라 불리는 가수 혹은 그룹 들이 시장을 휩쓰는 바람에 신세대 가수들끼리도 스타덤에 오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 아니면 도’ 식의 ‘베팅 문화’가 지배하는 음반 시장에서, 상황 변화에 적응이 느린 편인 나이 든 가수의 음반이 살아 남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댄스 곡들끼리도 속도 경쟁을 벌이는 무한 경쟁 틈바구니에 성인 취향 음반들이 끼여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요 순위 프로는 사기다”

KBS 2 FM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김우석 PD는 “우리 대중 음악의 상황을 보면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 같다는 느낌을 준다. 제작자·수용자·미디어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한 장르에 휩쓸린 것은 아마도 60년대 비틀스 혁명 외에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PD는 ‘음악이 사람을 찾아가는 구조와 하위 문화가 취약하다’는 점을 성인 문화가 궤멸한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다. 극장 리사이틀이 사라진 이후 일상적으로 쉽게 음악을 접할 라이브 콘서트 홀이 없다시피 하고, 음악 활동의 장이 텔레비전으로 일원화한 상황에서 다양성을 기대하기란 무리라는 것이다.

게다가 대중 문화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하위 문화가 존재하지 않아 10대 문화로 획일화하는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음악도 스포츠와 똑같다. 어릴 적부터 공을 차고 노는 데 익숙한 남미 선수들이 축구를 잘하는 것처럼 튼튼한 하위 문화는 건강하고 다양한 문화를 낳는 모태이다. 하위 문화가 말라버린 상황에서 다양한 문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라고 김PD는 말했다.

한국에서는 지금 공중파 방송이 대중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요 순위 프로그램은 10대들의 문화 독점을 가능케 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방송사들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순위를 정한다지만, 정확한 음반 판매량을 집계해 순위를 매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음반 판매량 집계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음반 판매량으로 순위가 결정되는 게 아니라, 순위가 음반 판매량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는 기만적인 순위 프로그램을 하루빨리 폐지해야 다양한 대중 문화를 기대할 수 있다.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순위 프로그램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기나 다름없다.” 대중 음악 평론가 강 헌씨의 말이다.

강씨에 따르면, 성인 대중 음악을 메마르게 한 가장 큰 책임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음악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 옛날의 명성에 기대고만 있을 뿐 어려운 상황을 뚫고 나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용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음반을 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좋은 여건이 아무리 조성된다 하더라도, 결국 좋은 예술품이 나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수용자들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서태지가 등장한 이후 댄스 음악 열풍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져 왔으나, 성인 대중 문화의 부활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가요계에서는 본다. “<토토즐> 같은 프로그램이 그냥 죽은 게 아니라, 길게 보면 자양분이 될 것이다”라는 주철환 PD의 말처럼, 성인 대중 문화 부흥을 꾀하는 씨앗들이 꾸준히 뿌려지고 또 싹이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 대중 문화, 되살아날 가능성 높아

드라마 <용의 눈물>은 성인 취향 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올해에는 70년대 그룹인 산울림이 다시 등장해 새 음반을 발표했고, 신중현 헌정 음반이 나와 9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조용필씨 16집 앨범은 20만장 이상을 판매해 ‘노장’의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서도 대중 음악계가 올해 경험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지난 10월 한 달 서울 대학로 라이브 소극장에서 펼친 중견 가수들의 소극장 공연이다. 조용필·심수봉·김수희·이선희 씨가 한 달 동안 무대에 오른 이 공연은 전회 매진을 기록하는 예기치 못한 성과를 올렸다. 기성 세대의 대중 문화 향유 욕구가 확인된 셈이다.

소극장 무대에 처음 섰다는 조용필씨는 “밀착도가 높은 소극장에서 30~40대의 문화 욕구가 매우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년부터는 디너쇼를 지양하고, 보름에 두 번 정도 소극장 콘서트를 갖겠다. 댄스 음악에 소외되는 성인 대중의 라이브 콘서트 문화를 가꾸는 일에 앞장서겠다”라고 말했다.

강한 비트와 속도 경쟁을 하는 10대 취향의 댄스 음악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양한 문화, 곧 건강한 문화를 해치는 획일화이다. 대중 문화 생산자와 매개자 들이 꾸준히 씨를 뿌리고 있는 만큼 성인 대중 문화의 부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증후군’이 자주 일어나는 대중 문화의 속성을 보면, 상황이 급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같은 일은 수용자들이 참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즐길 만한 문화가 없다고 푸념만 할 것이 아니라, 자기 문화를 만들고 가꾸려는 성인 수용자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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