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까막눈 천재'장승업 100주기 특별전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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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 장승업 백주기 기념 특별전>/간송미술관서 11월2일까지
이화가는 자기 이름이나 겨우 쓸 줄 아는 까막눈이었다. 그러나 그는 급격하게 몰락해 가는 한 시대 분위기를 몸으로 읽고 괴로워했다. 기존 가치관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세기말 상황은 그의 삶을 떠돌이 생활로 몰아넣었다. 그에게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 자체가 속박이었다. 그림을 그려 번 돈은 언제나 술값으로 날아갔고, 배가 고프면 부잣집을 찾아가 술과 밥으로 배를 채운 뒤 흥이 나면 그림을 그려 주었다.

19세기 말 데카당스 경향이 광범위하게 퍼졌을 무렵 어느 프랑스 화가의 삶 같지만, 이것은 같은 시대 조선에서 살다간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1843∼1897)이라는 한 천재 화가의 이야기이다. 그는 왕명도 두려워하지 않은 당대 최고의 자유인이었다. 그는 화풍 못지 않게 자유 분방한 삶으로 유명했다. 그의 이름 자체가 한 시대의 분위기를 상징했던 것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작품보다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던 장승업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큰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전영우)가 주최한 <오원 장승업 백주기 기념 특별전>(10월19일∼11월2일·02-762-0442)은 도판으로만 겨우 볼 수 있었던 오원의 작품을 직접 대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이다. 오원이 남긴 작품이 그리 많지 않아 이를 소장한 미술관도 많지 않을 뿐더러,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이 20여 년 만에 여는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75년 간송미술관이 오원 전시회를 처음으로 열기 전까지만 해도 오원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에 의해 생년만 밝혀져 있었다. 간송미술관은 당시 오원전을 처음 열면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는데, 그 성과 속에는 오원의 제자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이 스승의 그림 <삼인문연도(三人問年圖)> 등에 적어놓은 기록을 통해 처음으로 밝힌 오원의 정확한 사망 연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전시는 그 연도를 밝혀낸 간송미술관이 100주기에 맞추어 여는 대규모 특별전이다.

100주기 기념 특별전인 만큼 이 전시는 오원 그림의 면모를 드러내는 그림을 총망라한다. 고종의 대령 화원(待令 畵員)으로서 임금에게 그려 바쳤던 그림을 비롯해 밥이나 술을 먹으려고 붓을 휘두른 작품에 이르기까지 오원의 다양한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그림이 모두 나와 있다. 산수·인물·기명절지(器皿折枝)·화조·영모(翎毛) 등 어느 것 하나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그의 참 모습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전시회인 것이다.

그의 놀랍고도 빼어난 기량은 작품 60여 점을 통해 소개된다. 기품 있는 선묘에 의해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삼인문연도>, 사람의 수명을 맡고 있다는 남극성(南極星)의 화신인 노인의 모습을 훈훈하고 느긋한 봄밤과 가을 새벽 서릿바람의 분위기 속에 표현한 <춘남극노인도(春南極老人圖)> <추남극노인도(秋南極老人圖)>, 탈속(脫俗)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송하녹선도(松下鹿仙圖)> <추정귀선도(秋庭龜仙圖)> 등은 오원의 천재적인 기량이 빚은 작품들이다.

오원의 천재성은 조선의 고유한 색채를 계승·발전시키거나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데서 발휘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기량은 독창성보다는 오히려 중국의 그림을 본받아 그리는[倣作] 데서 빛을 발했다. 19세기 당시 조선의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청조(淸朝) 고증학이 조선 성리학의 뒤를 이어 조선의 새로운 이념 기반으로 자리잡은 다음, 청조 문인화풍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 의해 추사체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인 출신인 추사의 제자들은 스승의 문인화풍이 갖는 심오한 내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형식만을 모방했다. 추사의 제자들은 진경 풍속화풍의 전통을 외면하고 중국화풍을 맹목적으로 모방했는데, 오원은 이런 현상이 더 심했던 그 제자들의 다음 세대이다. 오원은 맹목적으로 중국을 모방하는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셈이다.

중국화 모방하며 천재성 발휘

오원이 중국 모방에 천재성을 발휘한 연유는 그의 출신 성분과 작가 입문 동기에서 연유한다. 오원은 어린 시절중인 출신 동지중추부사 이응헌의 집에서 심부름을 하던 상노였는데, 이응헌은 원·명 이래 중국 명인 서화를 많이 수장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주인집에서 어깨 너머로 구경하던 그림을 제법 그려내는 그 아이에게 주인이 종이와 필묵 등 모든 도구를 갖추어주고 오직 그림만 그리게 하자 오원은 그림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북학(청조 고증학)에 기울어 있던 중인 출신 후원자들은 오원으로 하여금 중국 정통 화법에 충실하도록 강요했다. 오원의 중국적 화풍은 당시 청조 취미에 빠져 있던 궁정에서도 크게 환영받아 고종은 특명을 내려 오원을 화원으로 불러들였다. 오원은 자유 분방한 생활을 그리워하며 몇번이나 시도한 끝에 결국 숨막히는 궁정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가 고종에게 그려 바쳤던 어용화를 비롯한 뛰어난 그림들은 한번 본 그림은 무엇이든 재현해내는 놀라운 기량을 통해 탄생한 것들이다. 위창 오세창은 그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오원은 어려서부터 글자를 알지 못하였으나 명인의 진적(眞蹟)을 많이 보았고 또한 기억력이 좋아서 비록 몇년이 지난 뒤에라도 안보고 그리되 터럭 끝만큼도 틀리지 않았다.’

오원은 일자 무식이었다고 소문 나리만큼 기초 학문이 없었으나 문인화마저도 회화적인 차원으로 소화해 버리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은 “아마 그의 호방불기(豪放不羈)하는 탈속한 기질이 바로 문인화풍의 고고한 취향과 일맥 상통하는 데서 연유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한다.

몰락해 가는 시대 분위기를 온몸으로 떠안고 살다 간 조선 시대의 마지막 천재 화가는 비록 중국화를 소화·재현하는 데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으나, 정통 화법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대담한 필치는 현대 한국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원이 현대 한국화의 시조로, 그의 회화 세계가 현대 한국화의 원류로 평가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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