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상] 디지털 시대의 한글 혁명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7.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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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 천여 가지 시판…멋부리기 넘어서 효율 경쟁
며칠 전 딸에게 무안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송씨(45·주부)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딸이 읽고 있는 편지를 슬쩍 들여다본 것이 화근이었다. “걔 참 글씨가 곱구나.” 송씨가 한마디하자 딸은 깔깔거리며 대답했다. “엄마, 이건 컴퓨터 글씨에요.”

한글 글꼴(서체)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글꼴 하면 명조나 고딕만 있는 줄 알던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글꼴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개중에는 송씨가 본 편지처럼 육필(肉筆)과 구별하기 어려운 글꼴도 많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관련 업계 추산에 따르면,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글꼴은 천여 가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반포(1446년)한 지 5백여 년 만에 실로 글꼴의 백가쟁명 시대가 열린 것이다.

육필 뺨치는 컴퓨터 글씨

글꼴이 범람하다 보니 일각에서는 우려하는 소리도 나온다. 자음과 모음의 비례를 파괴하고 들쭉날쭉하기 일쑤인 이들 글꼴이 한글의 전통적인 미감(美感)을 파괴하고 눈에 피로를 더해 준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글꼴 디자이너(폰트 디자이너·타이포그래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들은 이같은 비판을 일축한다. 글꼴 개발은 단순히 한글로 멋을 부리는 작업이 아니며, 자기들이야말로 디지털 시대를 이끌 주역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을 앞장서 전파하는 이가 한재준 교수(대유공전·광고디자인)이다. 글꼴 디자이너로 출발한 한교수는 ‘글꼴 발전이 정보화를 앞당긴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다. 글꼴과 정보화.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가지 개념을 연결하는 고리는 매체 환경의 변화이다(104쪽 상자 기사 참조). 활자 매체 시대와 영상 매체 시대의 글꼴은 엄연히 달라야 한다는 것이 한교수의 주장이다.

한 예로 ‘문화’라는 글자를 손으로 쓰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컴퓨터 키보드로 이를 입력하면 화면에 ‘ㅁ→무→문→ㅎ→호→화’ 순으로 글자가 나타난다. 초성에 중성·종성이 더해질 때마다 글자의 형태와 위치가 변하는 셈이다(‘ㅁ’과 ‘ㅎ’의 형태·위치를 눈여겨 보라). 영문자를 타이핑할 때는 나타나지 않는 이같은 현상 때문에 눈은 곧 피로해진다.

피곤하기는 글꼴 디자이너가 더하다. 이는 곧 글꼴 디자이너가 ‘ㅁ’ ‘무’ ‘문’ 글자를 각각 따로 디자인해 컴퓨터에 입력해 놓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디자인해야 하는 글자가 2천3백50자. 그나마 정부가 정한 KS규격을 따를 때가 이 정도이다. 한글 윈도95가 채용하고 있는 확장완성형 코드(2천3백50자를 먼저 가나다라 순서로 정리하고 잘 쓰이지 않는 8천8백22자를 여기 덧붙여 다시 가나다라 순서로 정리한 코드)를 따르자면 무려 1만1천1백72자를 디자인해야 한다.

이에 대해 한재준 교수가 내리는 처방은 간단하다. 낱소리 별로 글자를 한 가지 형태로만 만들자는 것이다(조합형). 이렇게 하면 ‘’ ‘’ ‘’ 처럼 초성·중성·종성 어느 위치에서도 자음과 모음의 형태·위치가 일정한 글꼴이 탄생한다. 이는 한글의 창제 원리와도 부합한다는 것이 한교수의 설명이다. 창제 원리대로라면 ‘문’은 ‘ㅁ+ㅜ+ㄴ’을 합친 소리글자이지 ‘문’이라는 글자가 의미를 갖는 그림 글자나 뜻글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글꼴 디자인 측면에서는 초성(19자)·중성(21자)·종성(27자) 67자만 만들면 한글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혁명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 화면에 ‘안녕하세요’라는 글자를 표현하기 위해 현행 KS코드로는 ‘ㅇ’ ‘아’ ‘안’ 순서로 글꼴이 모두 12개 필요하지만, 한교수 제안대로라면 ‘ㅇ·ㅏ·ㄴ·ㅕ·ㅎ·ㅅ·ㅔ·ㅛ’ 8개만 필요하다.
영상시대 ‘4차원 글꼴’ 선보여

이같은 발상은 사실 한교수에게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고(故) 공병우 박사는 50년대부터 이같은 원리로 설계한 세벌식 글쇠판(초성·중성·종성을 각각 한 벌씩 갖춘 글쇠판)을 개발·보급한 선구자였다. 이 글쇠판은 뛰어난 기능을 인정받았음에도 확산 속도가 느렸다. 글꼴의 조형성 파괴가 가장 주된 요인이었다. 꽉 짜인 네모꼴 글자의 균형미에 익숙한 사람들은 받침 있는 글자와 받침 없는 글자 사이에 들쭉날쭉한 공간이 생기는 세벌식 글꼴을 ‘괴이쩍다’‘애들 글씨 같다’며 거부했다.

이에 대해 한재준 교수는 “네모틀 글꼴의 미학은 파괴돼야 하고, 또 이미 파괴되고 있다”라고 잘라 말한다. 실제로 세벌식 글꼴로 대표되는 탈네모틀 글씨는 간판·광고·잡지 등을 통해 이미 곳곳에 침투해 있다. 사람들의 의식 또한 바뀌고 있다. 한글과컴퓨터사 조현주씨는 “신세대일수록 탈네모틀 활자, 실험적인 활자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라고 전한다. 개발한 사람조차 ‘이런 걸 일반인들이 쓸까’ 반신반의하면서 출시한 글꼴들이 몇 주 안에 학원가를 돌아다니곤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본문 전체를 탈네모틀 글꼴로 채운 책도 나오고 있다. 한양출판사가 기획·출판하고 있는 스물다섯 권짜리 창작 동화 시리즈가 그것이다. 오정희·정호승·박완서·송기원 씨 등 중견 문인들이 참여해 화제를 모은 이 동화 시리즈는, 한교수가 직접 개발한 탈네모틀 글꼴 ‘공한체’를 본문 서체로 사용했다. 공한체는 ‘세벌식 글씨체의 미래 지향적인 가치와 가능성을 높인 글꼴’이라는 평가(김정수 한양대 교수)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교수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서체 개발 전문 회사인 윤디자인연구소 임진욱 디자인개발실장은 “조합형 방식만 고집하면 오히려 한글이 지닌 풍부한 표현 양식을 활용하지 못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세계의 글꼴 디자인 추세가 이미지 중심으로 흐르는 만큼 한글의 감성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완성형 방식을 차용하는 것이 적절한 대안이라는 말이다. 이에 윤디자인연구소는 얼핏 세벌식 글꼴처럼 보이되 완성형으로 제작한(2천8백50자로 디자인한) 글꼴들을 최근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서울시스템 서체개발실 윤광용 부장 또한 “공병우 박사의 세벌식 타자기가 등장한 지 벌써 반 세기가 다 돼 가는데도 아직껏 사람들이 세벌식 글꼴에 전폭적인 지원을 보내지 않는 것은 그만큼 가독성·보편성·심미성이 떨어진다는 증거이다”라고 분석했다. 하드 웨어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조합·완성형 코드 구분이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된 만큼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시스템은 얼마 전부터 ‘차세대 폰트(SCF)’라는 새로운 개념의 글꼴 개발에 들어간 상태이다. 한글을 점과 획으로 분리해 유사한 점과 획을 같은 값으로 처리해 정보를 빠르게 전달한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ㅁ’의 경우 위 아래 획을 같은 값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들이 가진 문제 의식은 동일하다. 디지털 시대에 가장 걸맞는 한글 글꼴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특히 영상 시대가 닥쳐오면서 이들은 영상 매체용 활자, 곧 잉크가 아니라 빛으로 표현하는 활자를 연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비트 맵(글자 모양을 점으로 표시하는 방식)을 이용한 호출기·휴대용 전화기의 문자 서비스 등은 그 초보적인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서울시스템 윤광용 부장은 “활자 매체와 달리 영상 매체에는 다양한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는 4차원 글꼴이 다양하게 등장할 것이다”라고 전망한다. 페이드 아웃(밝았던 화면이 점차 어두워지는 기법)을 적용한 활자가 대표적인 예이다.
“글꼴 디자인, 저작권 보호받아야”

원대한 구상과 달리 이들의 현재가 탄탄하지만은 않다. 모방과 불법 복제는 가장 큰 적이다. 1년 매출액이 2백억 원 규모로 한정된 시장에 수십 개 업체가 난립하면서 이같은 현상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문제는 글꼴 디자인을 보호할 만한 법·제도 장치가 전무한 현실이다. 현재 글꼴 디자인은 저작권법 보호 대상이 아니다. 몇몇 업체가 이 문제를 놓고 송사를 벌였지만 대법원은 올해 1월 저작권법에 글꼴 디자인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최종 판결했다(저작권법 제4조 4항은 ‘회화·서예·도안·조각·공예·응용 미술 작품 또는 그밖의 미술 저작물’을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글꼴 디자인은 특별 입법 또는 저작권법을 개정해서라도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고 산돌글자은행 도상권 이사는 주장한다. 글꼴 하나를 개발하는 데 드는 기간이 6개월∼1년. 그런데다 경제적인 대가도 미미하고 법적인 보호까지 없으면 누가 글꼴 개발에 선뜻 나서겠느냐는 것이다. ‘정부 지원은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정당한 보호만은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 글꼴 디자이너들의 항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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