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주인공 감사용을 말한다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2004.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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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집념을 던진 그때 그 패전 투수
“저기로 가죠. 관중석에 올라가면 훨씬 잘 보입니다.” 4월10일 밤 11시. 서울 목동야구장에 전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감사용씨가 나타났다. 목동야구장에서는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연출 김종현) 야간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감사용. 프로 야구 선수로서 그의 전적은 ‘슈퍼 스타’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오히려 세간에서는 그를 패전 처리용 투수라고 불렀다. 그런 그가 스크린을 통해 ‘슈퍼 스타’로 거듭나는 것이다.

사람들 기억 속의 삼미 슈퍼스타즈는 참 별났다. 인천을 연고로 한 삼미팀은 최저 승률은 물론, 팀 최다 연패(18패), 1게임 최다 피안타(38개), 국내 첫 노히트 노런 허용 등 ‘패배에 관한 불멸의 기록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1982년 시작된 감사용씨의 프로 이력 또한 그리 찬란하지 못했다. 1987년 OB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는 총 1승 16패 1무 1세이브를 기록했다. 사람들은 기록적인 패배의 현장에 늘 감씨가 있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감씨에 따르면, 팀에 패색이 짙어갈 즈음이면 동료들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고 한다. 그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마무리 등판을 많이 하긴 했지만 패전 처리 전문이라고 불리는 것은 좀…” 이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상대 팀은 감사용이 등판하면 감사했다”

지난해 말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박민규 지음)에 이어 <슈퍼스타 감사용>까지, 갑자기 만년 꼴찌 팀이었던 삼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참 공교롭다. 소설보다 영화가 뒤이지만, 기실 영화가 더 오래 전부터 기획되고 있었다. 감사용씨는 “7년 전인가. 한 총각이 다짜고짜 뵙고 싶다고 전화를 했어. 말투가 서울 사람이야. 멀리서 온 사람이라 그냥 만났지”라고 말했다.

‘그 때 그 총각’이 지금 메가폰을 잡고 있는 김종현 감독이다. 처음에는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자기는 영화하는 사람인데, 뵙고 싶었노라고. “안부 전화만 줄창 하더라고. 1년 뒤엔가, 내 얘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하더군. 펄쩍 뛰었지.” 감씨가 손을 젓기를 몇 번. 김종현 감독은 그 사이에도 잊을 만하면 안부 전화를 하고, 남쪽에 내려갈 일이 있으면 꼭 그를 찾았다.

제대로 일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 젊은이 몇 명이 찾아왔다. 식사 자리가 파할 즈음, 김감독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시나리오였다. 표지부터 감사용을 놀래켰다. ‘슈퍼스타 감사용’. 감씨는 “내 이름 쓰는 걸 허락했으니 할말은 없지만, 슈퍼 스타라니. 아, 내가 조용필이야, 박철순이야, 최동원이야? 앞이 캄캄하데”라고 그 때를 돌이켰다.

김종현 감독은 왜 감사용에게 그렇게 집착했을까. 김감독은 어린 시절 삼미에게는 ‘천적’과 같았던 OB 베어스의 열혈 팬이었다. 그는 경기가 끝날 때쯤 항상 등판하던 감사용 투수를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기억했다고 한다. ‘상대 팀은 감사용이 등판하면 감사했다’는 우스개도 돌았다. 하지만 김감독은 자라면서 주변에서 ‘숱한 감사용’을 만나게 된다. ‘내가 왜 그렇게 감사용을 비웃었던가.’ 자료를 뒤지던 그는 감사용씨가 아마추어 출신으로 프로에 입문한 입지전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감독이 ‘발견’한 대로 감사용씨는 직장인 야구팀 출신으로 프로 야구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감사용씨의 프로 입문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감씨가 처음 제대로 된 야구 글러브를 손에 쥔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마운드에 섰을 때 주위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그 황홀한 첫 순간의 기억이 그를 야구인의 길에 들어서게 만든 것이다.

그는 미친 듯이 공을 던졌고, 좌완 투수가 드물 때여서 마산고등학교에 야구 특기자로 진학했다. 새벽 5시30분부터 체력 단련을 했고, 훈련이 끝난 뒤에도 홀로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어려움이 닥쳤다. “팀이 4강에 들지 못해 4년제 대학에 가지 못했고, 실업팀도 나를 부르지 않았지. 그 때 인천체육전문대학 감독님이 내가 왼손 투수이고 또 몇 이닝은 감당하겠다 싶다며 날 불렀어.”

1년 동안 선수로, 1년 동안은 인천체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보냈다. 제대한 뒤에는 더욱 막막했다. 1981년 감씨는 삼미특수강에 일반 사원으로 입사했다. 구매·관리·통관 업무가 그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야구 사랑은 멈출 줄 몰랐다. 직장인 야구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82년, 드디어 프로 야구 시대가 열렸다. 1981년 겨울, 삼미 야구팀이 마침 남쪽으로 전지 훈련을 내려왔다. 회사는 그에게 겨울 훈련 동안 야구팀을 챙기라고 ‘파견 근무’를 명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열성으로 일한 끝에 인천으로 올라가는 팀에 합류했고 회사는 그에게 다시 ‘1년 파견 근무’를 명했다.
삼미의 기록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나마 팀이 청보로 넘어가면서 수명도 길지 못했다. 감사용은 삼미특수강으로 원대 복귀하거나 청보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할 갈림길에 섰다. 그는 주위 예상을 깨고 다시 프로 선수의 길을 택했다. “이왕 들어선 길에서 끝을 보고 싶었지. 삼미 동료들은 은근히 다시 내려와서 옛날처럼 신나게 야구팀을 꾸리기를 바랐지만.”

그는 청보를 거쳐 1987년 OB에서 선수 생활을 끝냈다. 그 때 나이 서른둘. 이후 그는 공식적으로는 은퇴한 야구인이었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은 식을 줄 몰랐다. 지역에 야구협회를 만들고,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야구팀을 창단해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에게 슬쩍 소설 얘기를 건네보았다.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 클럽>에서 작가 박민규씨는 삼미에 대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받기 힘든 공은 받지 않는다’며 누구나 프로가 되기를 강요하던 당시의 폭력적인 시대 정신에 정면으로 저항했던 팀으로 자리매김해 놓았기 때문이다. 작가야 꼴찌 찬가를 위한 포석으로 그렇게 말했겠지만, 최선을 다한 당사자들로서는 썩 유쾌하지 않을 듯했다. 감사용씨는 씩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민규씨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몹시 멋쩍어하더라는 것이다. “미안해 할 필요없는데, 참 숫기가 없더구만.”

감씨는 작가를 만나기 전 한 일간지 기자로부터 소설책을 선물받고 그 날로 독파했다고 한다. 그는 “구단이 넘어갈 때 인천 시민들이 아쉬워하는 대목, 한 어린이가 삼미 선수에게 편지를 쓴 대목에서는 코끝이 시큰하데”라며 몇 번 눈물을 훔쳤다고 말했다.

소설이건 영화 시나리오건 자신의 생각과 다른 대목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그는 섭한 기색이 없다. 감씨는 “내가 이름 쓰는 걸 허락하면서 그랬어. ‘김감독, 총각이지? 이거 해서 장가도 가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내 이름 달린 영화가 만든 사람들한테 폐 안 끼치기만 바랄 뿐이요”라고 말했다. 영화는 오는 9월 개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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