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평]맥빠진 뮤지컬<96 고래사냥>
  • 이영미 (연극 평론가) ()
  • 승인 1996.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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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96 고래사냥>/의미 잃은 70, 80년대 낡은 잔재로 일관
 
“이미 영화로 서너 편 이상 만들어진 <고래사냥>이 뮤지컬로 부활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친정 아버지로서 몹시 반가웠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과연 1996년의 신세대들에게도 이와 같은 청춘상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뮤지컬 <96 고래사냥>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프로그램 팜플렛에 실린 원작자 최인호의 이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아이디어가 좋은 기획이었다. 품위 떨어지는 짓을 하거나 외국 뮤지컬을 수입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대중성과 상업성을 지닐 수 있는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주연급 배우 3명을 엮어내고, 90년대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연출가 이윤택이 결합한 것도 기대되는 바였다(물론 최인호와 같은 우려가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나만이 이런 기대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짐작컨대 흥행은 성공적일 듯하다. 그러나 작품은 꽤나 실망스럽다. 겉으로 드러난 결함은, 신통치 않은 줄거리와 긴밀하지 않은 구성, 늘어지는 진행, 숭숭 뚫린 무대 공간, 잔재미에 매달려 있는 연기 등일 터이지만,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형상화 기술의 문제들보다 더 심층적인 곳에 있다. 이 작품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90년대에 대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신세대 감각의 세태적 콩트 모음 <바보들의 행진>과, 이를 신파성을 배제하고 참신한 영상 감각으로 꾸며낸 영화 <바보들의 행진>, 그리고 70년대 청년 문화 세대가 80년대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발언인 소설 <고래사냥>과 그것의 통속적 변주인 영화 <고래사냥>은, 밀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당대적 발언으로서 알맹이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고래 잡으러 자전거 타고 동해로 가는 병태 친구 영철(<바보들의 행진>)이나 세상살이에 도통한 듯한 지식인 거지 왕초(<고래사냥>), 70년대적 ‘순수’와 80년대적 ‘피억압’의 복합적 의미를 지닌 춘자(<고래사냥>) 같은 인물 설정은 다 충분히 당대적 인식의 뿌리를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96 고래사냥>은 이 틀을 놓고 96년식 변주도, 과감한 개작도 하지 못했다. 가장 통속화한 영화 <고래사냥>을 저본으로 하여 이미 의미가 탈각된 70, 80년대의 잔재들을 지닌 채, 줄거리만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뿔싸, 구성과 줄거리조차 연극으로는 만들기 힘든 로드무비의 그것이다. 그러니 춘자의 고향 찾기도, 병태의 고래잡이도, 왕초의 ‘개똥 철학’섞인 기행(奇行)도 이 작품에서는 의미로 살아오지 않으며, 다른 설정이나 다른 의미 부여도 없다.

연출자는 이러한 극본의 문제점을 보완하지 못하고 무대의 규모에 허덕거리느라 그가 언젠가 뮤지컬의 특징이라고 지적한 빠른 속도감조차 살리지 못했으며, 성격을 구축할 수 없어 하릴없이 코믹한 작은 연기에 매어 있는 배우들이 안쓰러워 보였다. 여전히 평범하지만,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말려>보다는 연극적으로 적응한 음악이, 작곡가 김수철에게는 작은 성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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